남문희한국에 친미 보수를 표방한 정권이 출범하면서 최근 일본 내에서 재일 동포에 대한 처우가 또다시 악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는 남북 관계 개선 전망도 불투명해 마음만 답답한 상황이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늘 빚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일본해협 건너에 있는 조국. 그 조국은 늘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불편하게 했다. 친지 중 많은 사람이 이러저러한 모함과 누명으로 조국의 감방에서 청춘을 보내기도 했고 또 조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채 힘들게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한도 북한도 내 조국이란다. 일본에 머무르게 된 뒤 그들의 몸은 재일(在日)일지언정 마음과 혼은 늘 조국의 하늘을 헤매는 삶이었으리라.

재일 동포와의 첫 만남은 1993년 봄, 나가사키 하시마에서였다. 나가사키 앞바다의 절해 고도 하시마는 일본인조차 지옥도라 부르던 처절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조그만 무인도인 그 섬의 해저에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는 데 필요한 석탄이 묻혀 있었다. 일제는 조선 청년을 강제 징용해 해저에서 석탄을 채굴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시마는 바로 조선인의 해저 무덤이었다.

일본은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며 귀향 꿈꿔온 동포 1세대

당시 30대 초반 혈기 방장했던 필자의 가슴속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보름 동안 조선인 강제 징용의 자취를 찾아 일본 전역을 헤맸다. 그때 만난 재일 동포 1세 두 분이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지옥도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 오사카에서 생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70객이 다 되었건만 젊었을 때 바다를 수km 헤엄쳐 탈출할 정도여서 당당한 체격과 기개가 젊은이를 능가했다.

또 한 분은 도쿄 인근 가나가와 현에 살던 정정모 선생이었다. 정 선생은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청년을 구출하는 비밀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행방불명이 된 선배 두 사람과 동료의 행방을 평생 찾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일본 의과대학에 보내져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의혹을 품었다. ‘일본 전역이 바로 조선인의 무덤’이라던 그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두 번째로 가슴이 찡한 경험은 1996년 11월 총련계 상공인을 만났을 때였다. 그는 한국 대중가요를 필자보다 더 많이 알았다. 신곡이 나오면 서울에서 테이프를 구해 따라 불렀단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그는 필자를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총련계이면서 일본에서 손꼽히는 기업을 일군 그의 돌아가신 부친이 피눈물로 지은 집이었다. 그의 부친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기 집을 갖지 않았다. 그에게 일본은 잠시 머무르는 곳, 즉 재일(在日)의 대상이었을 뿐 영원히 둥지를 틀 곳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고향인 경상남도 고성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며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1980년 5·18이 터지면서 그의 꿈은 더 이상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밤새 통곡을 하고 난 그는 이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 정원에는 그의 부친이 고향 마을에서 가져다 심은 나무가 빼곡했다. 부친의 뜨거운 마음을 이어받은 아들은 정원에 고향의 상추를 심었다. 조선 상추였다. 일본 땅에서 자란 조선 상추는 2~3년만 지나면 특유의 맵싸한 맛이 사라진다. 그러면 고향에서 씨앗을 구해 다시 심는다. 조선 상추의 맵싸한 맛이 이역만리 떨어진 그와 고향을 연결해주고 있었다.

지난 주말 1박2일(2월16~17일)의 짧은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민족일보 연대포럼’이라는 동포 단체의 초청이었다. 이 단체는 1961년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박정희 정권에게 처형당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복권을 위해 5~6년 전에 결성된 순수 동포 단체이다. 이 단체 주관으로 ‘북한에 대해 생각하는 시리즈’가 달마다 한 번씩 열렸는데 필자는 그 두 번째 강사로 초청되었다.
왕복 항공비에 숙박비, 소정의 강사료까지 하면 만만치 않은 비용일 터인데, 서울에서까지 사람을 초청해 얘기를 듣고자 하는 그 열의가 놀라웠다. 토요일인데도 끝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경청하던 초로의 동포들 모습은 감명스럽기까지 했다. 

그들과의 만남은 필자에게 또 한번 자극이 되었다. 공기 속에 살면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고국에 있으면 그 고마움을 잊고 살기 십상인데, 그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이러저러한 정황에 화제가 옮아가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한국에 친미 보수를 표방한 정권이 출범하면서 최근 일본 내에서 재일 동포에 대한 처우가 또다시 악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과 남북 관계의 전망을 궁금해했다. 뭔가 희망스러운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마음만 답답해하다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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