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십만 부씩 나가는 슈퍼 베스트셀러는 없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소설 연합군이 서점가를 점령해가고 있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북스피어의 김홍민 대표는 서점가의 ‘장르문학 붐’을 이렇게 정리했다. 장르문학 춘추전국시대라 할 수 있다.

〈시사IN〉은 장르문학 전문가 15인에게 장르문학에 대한 앙케트를 실시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 추천작에 대해 물었다(각 3편씩 복수 응답). SF, 판타지, 추리, 호러 등 다양한 장르문학의 맥을 짚기 위해서였다. 또 이와 별도로 번역가 권일영씨가 운영하는 유명 인터넷 카페 ‘일본 미스터리문학 즐기기’(cafe.naver.com/mysteryjapan) 회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했다(49명 응답). 조사 결과는 그 자체로 장르문학에 입문하는 가이드 구실을 할 수 있다(128·133쪽 도표 참조).

조사 결과, 장르문학은 그 자체가 ‘취향의 제국’이었다. SF, 판타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이 언급되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일본 장르문학들이 ‘한국 장르문학 붐’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 미스터리는 서점가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분야로 출간되는 종수도 많아졌고, 유명 작가의 경우 전작들까지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장르문학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의 면모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그동안 장르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메이저 출판사들이 장르문학 전문 브랜드 자회사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펴내고 있다. 민음사의 황금가지, 웅진출판의 노블마인, 문학동네의 북하우스, 김영사의 비채가 대표적이다. 본격문학의 대명사 창비에서도 청소년이 볼 수 있는 SF, 판타지 선집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5월 장르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이 창간해 순항하고 있는 것도 장르문학 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공포문학 소설가 이종호씨는 “다양한 장르문학 책들이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르문학의 독자도 늘어나는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장르문학을 주로 읽는 독자층은 누구일까? 인터넷 서점 YES24의 도움을 받아 장르문학 독자층을 분석해보았다. 2007년 9월 현재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오른 장르문학 작품 가운데 하위 장르별로 8권을 추려 지난 2개월 동안 성별, 연령대별 독자층을 살펴봄으로써 각 장르의 독자층을 엿볼 수 있다.

장르문학의 핵심 독자층은 20대 여성

장르문학 독자층은 여성 비율이 높다. 영미권 팩션(〈살인의 해석〉), 일본 미스터리(〈모방범〉〈13계단〉), 고전 추리물(〈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서 남녀 독자층은 6:4의 비율을 보였다. 특히 20대 여성은 굳건한 핵심 독자층이었다. 특히 로맨스 소설(〈커피프린스 1호점〉) 독자층은 여성 독자가 70%에 이른다.

반면 무협 장르(〈비뢰도〉)는 다소 다른 독자층 패턴을 보인다. 남성 독자가 60% 정도를 차지하고, 그 가운데 20대 남성이 핵심 독자층을 이룬다.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20대 독자층이 강세를 보인다. 20대 독자층의 비중은 거의 절반에 이르렀다. 대체로 인터넷 서점의 고객은 30대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는 점을 떠올리면, 장르문학의 주 소비층이 20대인 점은 장르문학 자체가 ‘젊은 문화’의 아이콘임을 말해준다. 고전 추리물(〈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을 읽는 10대 독자층이 30%에 이르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판매량에서는 장르별 특성이 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통칭해 장르문학으로 묶이지만 SF는 여전히 마니아 중심성이 강하다. SF 마니아들이 ‘아이디어 회관’이라는 과거의 SF시리즈를 온라인을 통해 자발적으로 복원했던 ‘직지 프로젝트 1999’ 시절과 비교하면 출간 종수가 많이 늘었다지만 아직 소개되지 못한 작품도 많다. SF는 독자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충성도가 가장 높은 장르이기도 하다. 공포문학 같은 경우는 스티븐 킹을 제외하고는 외국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작가층도 얄팍하다.

판타지 문학 같은 경우는 시장이 이원화되어 있다. 몇몇 국내 작가와 영미권 판타지 소설은 서점에서 유통되는 반면, 대다수 국내 판타지물은 대여점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장르문학의 매력은 비주얼화하기 좋은 이야기성에 있다. 실제로 국내 영화사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등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고,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최혁곤 작가의 〈B컷〉, 이종호 작가의 〈이프〉 〈붉은 기와집〉)도 판권이 팔린 상태이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도 일본 장르소설 〈대유괴〉가 원작이다. 박상준 〈판타스틱〉 편집주간은 영상문화와 장르소설의 연관성을 언급한다. “근·현대사의 압박에서 자유롭고 미국·일본 드라마의 장르적 쾌감에 익숙한 젊은 영상 세대들이 대중문화 창작과 소비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장르적 스토리텔링을 선호해 그 다양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인터넷의 보급도 ‘장르문학 붐’에 일조했다. 과거에도 장르문학 팬들의 근거지는 PC통신이었다. PC통신은 충성도 높은 독자들의 아지트 구실을 했다. 그런데 PC통신 시절과 지금 인터넷 세대의 접속도는 그 규모가 다르다. 스티븐 킹 전문가인 번역가 조재형씨는 “외국 서적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는 독자들이 정보를 동호회 사이트를 통해 공유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장르문학이 젊은 독자들을 중심으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지만 아직도 편견은 남아 있다고 장르문학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안 좋은 책, 수준 낮은 책’이라는 편견 말이다. 임형욱 행복한책읽기 대표는 “SF소설은 ‘공상과학 소설’이라는 용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장르이다. 일본에서 수입된 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공상(空想)’이라는 말이 가진 부정적 뉘앙스 때문에 애들이나 보는 공상소설로 착각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SF는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미래 사회학이다”라고 했던 앨빈 토플러의 상찬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장르문학 인기는 ‘문화적 엄숙주의’를 견지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번역가 최필원씨의 말처럼 “순문학이든, 장르문학이든 타깃 독자층과 존재의 이유가 다른 만큼 ‘좋다’ ‘나쁘다’, ‘고상하다’ ‘천박하다’는 식으로 선을 긋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쁜 취향이란 없다. 추석 연휴, 장르문학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 ‘취향의 제국’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어떨까(딸린 기사 132∼134쪽 참조).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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