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뱅이는 동해에서 나는 물레고둥과의 고둥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동해를 지역 기반으로 하는’ 횟집에서 내는 ‘백고동’이 이 물레고둥과의 고둥이다. 쇠고둥이라고도 한다. 껍데기가 길며, 죽으면 살을 껍데기 밖으로 내민다. 살이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며 단맛이 난다. 동해 전역에서 이 고둥이 잡힌다.

골뱅이는 원래 고둥을 이르는 사투리였다.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루 골뱅이라 했다. 다슬기도 골뱅이라 하고 달팽이도 골뱅이라 이르는 지역이 있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골뱅이 통조림에 든 물레고둥과의 고둥을 골뱅이라 한정해 말하는 사회적 관습이 만들어졌다. 통조림의 골뱅이를 워낙 많이 먹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황교익 제공을지로 골뱅이 상차림. 달걀말이가 으레 따른다.

옛날에 골뱅이는 동해에서 흔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이를 쉽게 접할 수 없었다. 여느 고둥류에 비해 쉬 상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골뱅이를 맛있는 고둥으로 여기는데, 1960년대에 이를 통조림으로 만들어 일본으로 수출하는 업체들이 생겼다. 서울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서 최고의 골뱅이로 여기는 ‘동표’의 공장 설립연도도 1962년이다. 골뱅이 통조림 업체들이 일본 수출만 한 것은 아닐 터이니, 그즈음부터 골뱅이가 통조림에 담기어 서울에 입성했을 것이다.

1970년대에 생맥주 열풍이 일었다. 젊음의 상징이 막걸리에서 생맥주로 바뀐 것이다. 생맥주의 주요 안주로 골뱅이무침이 등장했다. 매콤새콤하게 무친 골뱅이는 주당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렇게 골뱅이를 먹어버린 탓인지 동해의 골뱅이가 씨가 말랐다. 일본으로 수출하기는커녕 외국에서 수입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때 중국·타이완에서 수입했는데, 요즘은 유럽에서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말 지금 형태의 골뱅이 탄생

을지로는 일제강점기에는 황금정통이라 불렀다. 그 당시 경성의 상업 중심지였다. 금융기관이 있었고 각종 상회가 밀집해 있었다. 오늘날 을지로3가에는 인쇄업체가 몰려 있다. 인쇄업체가 여기에 모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영화관이 이 일대에 몰려 있어서 영화 홍보 전단을 인쇄하는 업체가 있었고, 또 이 인근에 조선시대부터 한지 가게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인쇄 골목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도시 한복판의 낡은 건물에 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는 이들에 의해 인쇄업체의 수도권 외곽 이전이 시도되었으나 여전히 을지로3가 인쇄 골목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을지로 골뱅이는 이 을지로 인쇄 골목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을지로 골뱅이의 전통을 잇는다는 가게들은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일대에 몰려 있다. 원조임을 주장하는 한 가게는 1960년대 말에 지금 형태의 골뱅이를 처음 냈다고 말한다. 주변 상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즈음에 골뱅이무침이 탄생한 것은 맞는 듯하다. 단, 그때에는 아마 맥주보다는 소주나 막걸리의 안주로 팔렸을 것이다.

을지로 골뱅이는 여느 생맥주집의 골뱅이무침과 다르다. 파채에 고춧가루, 다진 마늘만 들어간다. 북어채도 곁들여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골뱅이와 양념한 파채를 따로 내기도 한다. 여느 생맥주집의 골뱅이무침은 어떠냐 하면, 여기에 식초·설탕 또는 고추장이 첨가된다. 을지로 골뱅이 가게에서는 식초·설탕 등을 넣지 않아야 골뱅이 맛이 살아 그렇게 조리한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을지로 골뱅이는 완성된 요리가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통조림을 따서 그대로 내놓기는 민망하니 대충 양념을 한 음식이라는 기분이 든다. 이 대충의 양념법에 을지로 골뱅이의 역사가 숨어 있다.

을지로 골뱅이는 원래 구멍가게에서 내놓던 메뉴였다. 요즘은 구멍가게가 많이 사라져서 이런 풍경을 보기 어려운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런 구멍가게에서 한잔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식탁이 없으면 계산대 위에 술과 안주를 놓고 서서 먹었다. 식당에서 파는 술에 비해 구멍가게의 술이 한참 싸니 이랬던 것이다. 안주도 필요할 것이었는데, 그래서 구멍가게 계산대 옆에는 땅콩·멸치·오징어·북어포 같은 마른안주가 늘 놓여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그 구멍가게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있는 골뱅이 통조림을 발견했을 것이고, 이것으로도 안주를 삼았을 것이다.


ⓒ황교익 제공을지로 어느 구멍가게의 골뱅이. 구멍가게 골뱅이는 여전히 싸다.

애초 골뱅이 통조림은 일본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조리법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추어졌고, 따라서 들척지근한 맛이 난다.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가 구멍가게 주인에게 매콤한 양념을 부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파채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으리라. 고춧가루와 마늘 정도만 넣고 이를 안주로 삼다가, 서비스로 파채도 넣고 통조림 국물이 아까우니 여기에 북어포를 더하고 하면서 지금의 을지로 골뱅이 조리법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1970년대 을지로 인쇄 골목은 민주화운동에 한몫을 했다. 당시 민주화운동의 무기로 인쇄물이 적극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골목의 인쇄소에서 밤새 ‘피’(반정부 유인물을 그리 불렀다)가 제작되어 대학가 등지에 뿌려졌다. 민주화운동에 ‘문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대학생 등 젊은 지성은 확인했다. 1980년대 들면서 이 경험은 출판문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을지로에 젊은 지성이 모여들었다.


직장인 몰리며 서울의 명물로

인쇄 노동은, 지금도 그렇지만, 무척 고되다. 그 작은 활판에 눈은 침침해지고 그 무거운 종이에 등이 휜다. 인쇄 단가는 낮아서 밤을 새워 일하지 않으면 밥을 벌 수가 없다. 그 거친 노동판에 젊은 지식노동자들이 섞였다. 구멍가게의 그 술판에서도 섞였다. 1983년 지하철 2호선 을지로 구간이 완성되면서 그 주변으로 오피스타운이 형성되었다. 이들 직장인도 을지로3가의 구멍가게를 넘보았다. 을지로에 새롭게 진입한 이들 ‘배운 젊은이’는 을지로 골뱅이에 대해 입소문을 냈고, 순식간에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여름이면 을지로 구멍가게 앞은 골뱅이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으로 빼곡했다. 더 많은 손님을 받으려는 이들이 골뱅이 전문점을 열었다. 간판에는 ‘을지로 골뱅이’라 써서 붙였다.

을지로 골뱅이 전문점에는 더 이상 인쇄 노동자들이 들락거릴 수 없다. 가격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골뱅이를 파는 구멍가게가 있기 때문이다. 겉은 ‘24시 편의점’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탁자 두어 개가 놓여 있고, 여전히 골뱅이를 판다. 이 구멍가게는 을지로의 가난한 노동자가 아니면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을지로의 외지인’은 원조라고 각자 주장하는 그 골뱅이 전문점으로 가서 그 대충 요리한 듯한 골뱅이에 맥주를 마신다. 그들은 그 대충의 양념법의 근원이 구멍가게에서 비롯한 것임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양념법을 말하며 사라져간 그 구멍가게를 추억한다. 을지로의 그 꼬불꼬불한 골목에서는 여전히 인쇄 기계가 밤새워 돌고, 구멍가게의 골뱅이도 여전한데.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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