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재앙이 벌어진 지 1년이 지났다. 연쇄 폭발이 일어났던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아직도 방사능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이고, 일본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1년을 맞아 〈시사IN〉 취재진이 일본 동북부를 찾았다. 지진해일(쓰나미) 피해 현장은 여전히 복구가 이뤄지지 않은 채 폐허 상태였고, 원전 일대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피난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이후, 한국과 다른 나라의 에너지 정책 현황 및 에너지 전환 움직임도 점검했다.

❶ 후쿠시마 원전 폭발 1년, 일본은 지금
 후쿠시마 현지 르포
 사고 이후 조선학교 학생들은? 
 도쿄 대규모 시위 현장
 이다 데쓰나리 지속가능에너지정책 연구소장 인터뷰

❷ 흔들리는 한국의 원전 신화
 한국 에너지 정책의 현주소
 원전 찬성하는 정치인은 누구?
 보통 사람의 탈핵 운동
 전문가의 탈핵 운동
 세계의 원전 의존도는?

 

 

 

 

 

 

 


‘손녀 바보’라 할 만큼 손주 재롱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하세가와 겐이치 씨의 생활은 지난해 3월11일을 기점으로 180도 달라져버렸다. 그날 일본 후쿠시마 현 소마 군 이타테무라(飯館村)에 있는 밭에서 일을 하던 중 그는 갈라지는 땅을 목격했다. 그때만 해도 ‘지구가 잠시 고장났구나’ 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에 이어 3호기까지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세가와 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진 이외의 재난은 평생 상상해본 적 없던 그에게 시간당 40밀리시버트(m㏜)라는 방사능 수치는 생소하기만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물질에 어떻게 대처하란 말인가.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 꼭 마스크를 써야 한다, 밖에 둔 채소는 먹어선 안 된다, 외출 후 겉옷을 다 벗어야 한다…. 삶은 온통 주의해야 할 것투성이로 바뀌었다. 더 엄격하게 하자면, 물을 마시거나 숨을 쉬어서도 안 되었다. 방법은 하나. 나고 자란 고향을 버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세가와 씨는 이타테무라에서 소 50마리를 키우는 작은 목장을 운영했다. 사고 후 소는 그냥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갓 짠 우유는 그냥 버려졌다. 소들은 도축됐다. 얼마 전 신문에서 후쿠시마산 우유의 방사능 수치가 매우 낮아졌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는 보도를 볼 때마다 다시 소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올해 세 살이 된 손녀 미우에게 먹일 수 있을까 자문해보면 고개를 절로 내젓게 된다”라고 말했다.

하세가와 씨가 살던 이타테무라는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약 40㎞ 떨어져 있다. 정부는 원전을 기준으로 반경 20㎞ 동심원을 그리며 강제 피난 구역을 설정했다. 또 30㎞ 이내 지역은 계획 피난 구역으로 지정해 ‘실내에서 머물 것’ ‘잠시 여관으로 대피할 것’ 따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방사능을 품은 북서풍은 이타테무라를 향했다. 비가 오면 방사능 수치가 더 높아졌다. 지난해 3월15일 빗물받이 통에서 검출된 수치는 시간당 1밀리시버트.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에서 제시한 연간 노출 한도인 1밀리시버트와 같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주민들은 빨래를 널고 밭을 갈거나 소에게 여물을 주었다. 사고가 난 지 열흘이 지나서야 이타테무라도 계획 피난 구역으로 지정됐다.


주민들 “인체실험 대상 된 것 같다”

원전 폭발 사고가 난 지 1년이 가까운 지금까지 이타테무라와 나미에마치에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방사능 수치가 3~15마이크로시버트(μ㏜/h)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기자가 일본을 찾은 2월19일, 도쿄 우에노에서 0.07마이크로시버트이던 방사능 수치는 후쿠시마 현 고리야마 시에 이르자 0.35마이크로시버트, 후쿠시마 시에 이르자 0.38마이크로시버트까지 올라갔다. 도쿄와 후쿠시마의 방사능 수치 차이는 5배에 달했다.

 

 

 

 

 

 

 

ⓒ시사IN 조남진임시주택에 살고 있는 하세가와 씨가 손녀를 안고 웃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안전하다’는 발표를 반복했다. 후쿠시마 현도 ‘마스크는 필요 없다’고 밝히면서 ‘방사능’ ‘피난’ 같은 단어를 피했다. 지난해 3월 사고 직후, 후쿠시마 현은 나가사키 대학 야마시타 교수에게 후쿠시마 현 주민들의 건강관리를 맡겼다. 그는 이타테무라 현장을 방문한 뒤 ‘밝게 웃으면 건강에 피해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피폭 검사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주민은 “갑상샘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의 인체실험처럼 조사 수단이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부 발표와 달리 달라진 환경에 먼저 반응한 것은 아이들 몸이었다. 후쿠시마 시내는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부터 60㎞ 이상 떨어져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후쿠시마 시에서 거주하는 나카테 세이치 씨(41)는 원전이 폭발한 뒤 12일 동안 아무런 대책 없이 아이들을 놔둔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했다. 일곱 살, 아홉 살인 어린 아이들은 방사능을 견딜 수 없었다. 방사능 수치는 한때 100마이크로시버트까지 올라갔다. 정확히 열흘 뒤 아이들은 연이어 코피를 쏟아냈다. 세이치 씨는 그 길로 아내와 아이들을 삿포로로 이주시켰다. 7월에는 그도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가족에게 간다. 가서 할 일은 정하지 못했다. 당분간 아르바이트라도 할 생각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생활할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사고 1년 만에 찾은 후쿠시마 시는 겉보기에 평온한 모습이었다. 인구 29만이 사는 소도시답게 거리도, 사람도 크게 번잡한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니시아동 공원에서 만난 60대 여성은 대뜸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사고 이후 공원에는 ‘놀이터에서 한 시간만 노세요’라는 간판이 세워졌다. 그러나 1년 동안 이곳에서 노는 아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놀이터에 세워진 하얀색 로봇 깡통처럼 생긴 방사능 계측기는 한때 12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시에서 제염 작업을 시작하고 땅을 갈아엎으면서 1.25마이크로시버트로 내려갔다. 그럼에도 그녀는 “손자를 이곳에서 놀게 할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주부인 요네카와 치에코 씨(34)는 생선을 선택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어민들은 조업을 중단했다. 그런 만큼 생선 대부분이 홋카이도에서 온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2월22일 이타테무라에서는 오가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의 방사능 수치는 서울보다 45배 높았다.

 

 

다음 날 향한 곳은 후쿠시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자동차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마쓰카와. 이곳에는 이타테무라에서 피난한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임시주택 촌이 있다. 사고 직후, 후쿠시마 현내에서만 3만500여 명이 피난했다. 이타테무라 주민 6200여 명 또한 정부가 마련해준 임시주택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와타나베 미사키 씨(35)는 세 살, 열세 살 두 아이와 함께 지난해 8월에 50㎡(약 15평) 남짓한 이곳 임시주택으로 들어왔다. 그간 온천 지역 인근 여관과 부모님 댁, 친구 집을 전전했다.

그나마 온 가족이 함께 임시주택에 입주한 와타나베 씨는 행복한 경우였다. 시골 마을에는 대가족이 많았다. 그러나 1700가구이던 마을은 임시주택으로 옮기면서 2700가구로 나뉘었다. 소를 잃거나 밭을 잃은 것처럼 가족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임시주택 마을회관에서 만난 사토 아키야스 씨는 아들과 딸 등 식구 9명이 다른 곳으로 피난하면서 아내와 단둘이 남았다고 했다. 그는 “방사능보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더 슬프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콘크리트로 덮이지 않은 지역의 방사능 수치는 매우 높다.

 

 

정부는 후쿠시마 현 가운데 나미에마치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방사능 수치를 나타내는 이타테무라에 대해 왕래는 하더라도 거주하지는 못하도록 방침을 내렸다. 이타테무라의 상황이 궁금했던 취재진은 임시주택 촌에서 24㎞ 떨어진 이타테무라로 향했다. 취재진이 접근하는 동안 방사능 계측기 수치는 점점 높아졌다. 마을로 접어들자 2~3마이크로시버트까지 올라갔다. 취재진을 안내하던 일본인 통역은 “차에서 내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잠시 내려 땅바닥에 계측기를 대보았다. 수치가 5마이크로시버트까지 치솟았다. 서울과 비교해 약 45배 높은 수치다.


청소기·히터 못 트는 사람들

거리나 논밭에서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임시주택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이 유령마을로 돌아간 주민만 100여 명이라고 했다. 고향을 잊지 못한 이들이 거주를 불허한 정부 방침을 어기고 마을로 몰래 돌아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농지에 자란 무성한 잡초를 잘라내거나 자발적으로 두 명씩 짝을 이뤄 방범순찰을 돌거나 한다고 했다(원전 일대 버려진 마을에는 빈집털이범이 기승을 부린다).

사람 대신 목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 예닐곱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비쩍 마른 검은 소들은 굶주림에 지친 듯 취재진이 다가가도 미동이 없었다. 아사하지 않은 것을 보면 주인이 간혹 들러 먹이를 주는 모양이었다.

이토록 삭막해진 마을을 3·11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임시주택에 사는 이타테무라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하세가와 씨는 “일을 하지 않으니 배가 불룩해졌다. 얼른 일을 하고 싶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앞날은 불안하기만 하다. 방사능에 오염된 땅은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농사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일이라던 간노 다카유키 씨(68)는 “오염된 땅에서 자란 쌀과 브로콜리, 마늘을 누가 사줄까”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세가와 씨는 이대로 이타테무라로 돌아갔다간 젊은이와 아이들이 살지 않아 결국 수년 내 마을이 없어지게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본래도 고령 인구가 대부분이었던 이타테무라는 3·11 사고 이후 상황이 더 나빠졌다. 젊은 사람들은 자녀 손을 잡고 후쿠시마를 떠났다. 마쓰카와 임시주택에 거주하는 피난민 중에서는 30대 중반인 와타나베 미사키 씨가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시사IN 조남진목장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소들이 꼼짝도 않고 서 있다.

 

 

더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방사능 공포가 여전히 이들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방사능은 지역의 경계를 두고 이동하지 않았다. 반경 20㎞, 30㎞는 인간이 만든 분류일 뿐이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방사능도 함께 움직였다. 하세가와 씨가 살던 고향집의 경우 지난해 12월29일 3.6마이크로시버트였던 방사능 수치가 올 1월18일에는 4.18마이크로시버트로 더 상승해 있었다. 임시주택에서 만난 주민들은 집 안에서는 청소기나 히터를 틀지 않는다고 했다. 공기 중 방사성 물질을 날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상황을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실내에만 있을 경우 바깥에 비해 80%가량 방사선량이 줄어든다는 걸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소를 기르고 밭일을 하던 사람들이 좁은 임시주택에만 머물기엔 몸이 너무 근질거렸다. 가설주택에 거주하는 이들은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거나 화분을 심는 등 방사능에 오염됐을지도 모르는 흙을 만지고, 물을 주고 있었다.


피난이나 이주, 말도 못 꺼내

후쿠시마 시에서 만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 보던 것과 달리 방진복이나 마스크를 착용한 이는 극히 드물었다. 후쿠시마 역 앞에서 만난 30대 남성은 “모든 장비를 착용하는 건 피폭의 위협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방진복과 마스크는 이들에게 방사능보다 더 큰 불안을 주는 것 같았다. 히토쓰바시 대학 이카이 슈헤이 교수는 “후쿠시마 현 인구 200만명 가운데, 5만명가량이 다른 현으로 이주했지만 90%는 그대로 남아 있다. 방사능을 피해야 한다는 건 합리성을 따지는 외부인의 시각이다”라고 말했다. 검출기에 따르면, 기자는 후쿠시마에 머무르는 3일 동안 약 11마이크로시버트에 노출됐다. 이런 농도로 1년간 노출되면 연간 1.338밀리시버트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얘기다. 일반인 연간 피폭량 한도인 1.2밀리시버트를 웃돈다.

그렇다고 피난이나 이주를 입에 올리기도 어렵다. “자칫했다가는 소심하다거나 지역을 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라고 후쿠시마에서 만난 한 주민은 말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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