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있는 작은 해변 마을에 놀러온 소녀 레베카는 토미를 만나 풋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엄마를 따라 일본에 간 레베카는 12년간 토미를 만나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돌아온 레베카는 다시 토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토미가 자동차 사고로 숨지자 레베카는 그의 유전자를 복제한 아이를 낳기로 한다. 토미라는 이름의 아이가 다시 태어나고, 레베카가 그를 처음 만났던 시절의 나이가 되고, 대학에 가서 여자친구를 데리고 올 나이가 된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레베카의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연정일까, 모성애일까?

베네덱 플리고프의 〈움〉이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범한 문제의식에 비해 영화를 보고 나면 ‘인간 복제’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레베카가 토미를 복제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유욕일까? 홀연히 내 곁을 떠나버린 연인,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이런 갈망은 스릴러나 공포물에서 흔히 엿보인다. 스티븐 킹의 〈애완동물 공동묘지〉에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묘지가 등장한다.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은 이들은 모두 지옥을 경험한다. 그들이 돌아온다 한들 이미 과거의 그들이 아니니까. 부활은, 혹은 재생은 결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유전자를 복제한다는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10여 년 이상을 함께한 애완동물이 죽은 후의 상실감을 생각해보면 ‘복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도 같다. 일단 외관상으로는 거의 동일할 테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유전자가 같으면 과연 ‘같은 존재’일까? 같은 외양만이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과연 내가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일까? 유전자 복제는 외양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습관 같은 것도 비슷하게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질문이 남아 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과연 우리는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얼굴? 지성? 영혼? 유전자 지도를 모두 해독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인간다움’의 정체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다.
 


복제 인간에 대한 영화는 많았다. SF에서는 안드로이드와 사이보그 등을 포함한 인간의 확장형, 장기이식을 위한 유전자 복제, 복제 인간의 정체성 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네버 렛 미 고〉에는 오로지 장기이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고 담담하게 ‘대체재’라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움〉에도 복제 인간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복제 인간이 장기이식이라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은 대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까? 만약 영혼이 있다면, 복제 인간과 인간의 영혼은 다른 것일까?

던컨 존스 감독의 〈더 문〉에는 달의 기지에서 홀로 임무를 수행하는 남자가 나온다. 사실 그는 복제 인간이다. 위험한 상황이 있을 때마다 대체 인력을 보낼 수 없기에 복제 인간을 만들어놓고, 사고를 당하면 이전까지 기억을 백업해 다른 복제 인간이 성실하게 임무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제 인간이라는 것을 몰랐다. 〈네버 렛 미 고〉의 복제 인간들도 누군가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기억을 만들어가고,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아마도 레베카 역시 알게 되었을 것이다. 토미를 다시 곁에 두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소유한 것은 같은 외양의 다른 사람이었음을. 동일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복제’될 수는 없었다.

기자명 김봉석 (영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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