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장식한 키워드를 정리하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입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이슈를 묻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다. 그래야 지난 시간을 고이 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위로할 수 있다. 이를 딱히 부정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미신처럼 얽매여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길 필요는 없다. 특히 출판시장이 만들어내는 거의 절대적 하드웨어인 책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나의 트렌드가 성립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현상의 필연적 이유’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 ‘변화의 촉발’ 그리고 ‘지속력을 가지는 힘’이라는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을 생성하고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대중의 욕구(needs)라는 부분이 선행되어야 한다. 욕구가 없는 잉태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뉴시스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더불어 그와 관련된 책들이 인기다.

그래서 시장은 늘 대중 혹은 소비자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욕구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관찰하려 든다. 첨단 마케팅 기법들이 쏟아내는 눈부신 이론과 매뉴얼의 바탕이 바로 이러한 욕구 탐색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쉽지 않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제럴드 잘트먼 교수는 “말로 표현되는 욕구는 5%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 대입하자면 아무리 뛰어난 분석이라고 해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대중의 ‘진짜 욕구’는 고작 5% 정도라는 이야기다.


많이 팔렸는데, 많이 읽혔을까?

다소 극단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라 보고 수치를 올려 조정한다고 해도 그리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책을 통해 이러한 분석을 해보겠다고 덤비다가 무기력하게 물러나거나 잡히지 않아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책이란 기본적으로 모든 현상의 용광로다. 모든 것을 녹이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인풋(투입)과 아웃풋(산출)의 반복적 과정에 투입되는 요소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어서 특정하려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연말이면 넘쳐나는 한 해 출판의 키워드나 트렌드 정리에 바쳐진 모든 수고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필자는 그 많은 책에 담긴 현상과 욕구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내는 것에 의심 가득한 경의를 보내는 쪽이다.

그래도 이 글의 목적은 정리를 좀 해보라는 것이다. 가장 편하고 일반적인 시도는 그해에 가장 잘 팔린 베스트셀러 몇 권을 두고 “출판시장의 키워드와 이슈는 이거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판매 부수를 따져서 키워드와 트렌드를 추출하는 것이 능사가 된다면 의미 있는 분석은 포기해야 한다. 월터 아이잭슨이 집필한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는 주요 서점의 일일 판매 기록을 갈아치우며 연말 순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티브 잡스와 그의 공식 전기가 2011년 출판의 트렌드와 키워드가 될 수 있을까? 저자와 출판사에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다. 천재라 불리는 한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대중이 보이는 헌화와 아쉬움의 의미를 뛰어넘기 어렵다. 자서전만 놓고 본다면 그는 가장 적절한 마케팅 포인트를 선물하고 세상을 떴다. 이 책이 트렌드가 되고 키워드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스티브 잡스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9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이 그 방대함에 걸맞을 만큼 회자되고 인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징후는 뚜렷하지 않다. 많이 팔렸는데, 누가 많이 읽었는가?


ⓒ시사IN 조우혜‘나는 꼼수다’(위)의 인기가 〈닥치고 정치〉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놓았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는 거의 로또 수준이다. 이 책은 이른바 기획의 4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타이밍’ ‘타이틀’ ‘티켓 파워’ ‘타깃’이 바로 그것이다.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책이다. 그렇다면 2011년 출판의 트렌드이자 키워드로 올리기에 손색이 없을까? 이 역시, 아니다. 이 책의 4요소를 만들어준 것은 후광효과다. 포인트는 팟캐스트 프로그램인 ‘나는 꼼수다’(나꼼수)와 폭로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 MB 정권의 실정이지 책이 아니다. ‘나꼼수’ 때문에 책이 팔리는 것이지 〈닥치고 정치〉 때문에 ‘나꼼수’ 청취율이 올라간다는 분석은 좀 어설프다. 덩달아 팔리는 정봉주 전 의원의 책은 이를 극명하게 설명하는 예가 될 것이다.

다소 모호한 경우도 있다. 박경철의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과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전혀 다른 콘셉트의 이른바 ‘청춘들을 위한 멘토’ 책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150만 부를 넘기며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으며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은 10월에 출간되었음에도 30만 부를 넘겼다. 김난도 교수는 예외라 쳐도 신간을 내지 않았는데도 그의 이름을 사칭하는 책을 다량 만들게 한 안철수와 더불어 법륜, 김용옥, 김제동, 문재인 등 이른바 ‘멘토’ 신드롬은 특히 ‘토크 콘서트’ 열풍과 더불어 20대에게 특별한 현상이 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멘토 열풍을 몰고 온 이들의 면면이 이미 대중성과 함께 상당한 티켓 파워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벼운 현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걸리는 점은 멘토 열풍의 시발점 역시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청춘 콘서트’에 몰린 뜨거운 관심과 확대의 근원이 과연 출판이었을까? 20대와 청춘에 대한 격려·지지가 올해의 유별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의 주도력 급격히 위축돼

소설시장의 헤게모니 역시 책이 아니었다. 이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해도 〈도가니〉 〈뿌리 깊은 나무〉 〈완득이〉 등을 상위권에 올려놓은 것은 드라마와 영화의 힘이었다.


ⓒ뉴시스박경철(왼쪽)과 안철수(오른쪽) 등이 멘토 열풍을 일으키며 책의 판매고를 높였다.

아동서이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도 같은 경우다. 올해 출간된 소설의 이른바 ‘순위권 전멸’ 현상은 이들 소설이 몇 년 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기 전까지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푸념을 낳기에 충분하다.

〈긍정의 배신〉 〈리딩으로 리드하라〉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생각 버리기 연습〉 〈두근두근 내 인생〉 등 각개약진한 책의 면면을 보면 훌륭한 책인데도 일정한 패턴을 형성했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정리를 요구한 글이니 이제 정리를 해보자. 첫째, 극단화된 일부 책의 놀라운 판매 성과와는 달리 2011년은 다른 매체에 비해 책의 주도력이 급격하게 상실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한 해였다. 발 빠른 기획이라는 미명으로 덮고 있지만 이제 상업출판 시장에서 기획은 창조성보다는 후광효과를 얼마나 빨리 인지하고 흡수하느냐로 옮아가고 있다. 책이 원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지금처럼 철저하게 의존적 속성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사회현상과 삶의 모습을 담아내는 책의 원래 기능은 그것에 대한 비판적 해석과 새로운 담론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냥 퍼 담아서 옮기는 것으로 끝난다면 책의 경쟁력은 낭떠러지다.

둘째, 독자와 주요 저자가 모두 교체되는 과도기의 정점을 보여준 해였다. 출판시장의 오랜 논쟁 중 하나는 이른바 386에서 이어져 486이 된 세대들의 시장 지배력이었다. 구매력을 가지면서 사회의 중심에 있고 뜨거웠던 현대사를 살아온 이들의 지식 욕구는 출판시장의 중요한 밑천이었다. 그 열정이 식지 않았다고 해도 과연 이들이 여전히 가장 큰 고객인가에 대한 의문은 ‘청춘 세대’의 등장으로 답을 찾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가운데 문학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의 저자 교체는 자연스럽다. 폭풍처럼 성장한 이지성이나 의심할 수 없는 김난도, 박경철 등의 위치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소설 〈도가니〉는 영화(위)의 후광효과 덕에 많이 팔렸다.

셋째, 책이라는 상품을 중심으로 한 출판 플랫폼의 구조적·형태적 변화의 방향이 좀 더 분명해진 해였다. 콘텐츠의 디지털라이징과 멀티유즈는 논쟁 자체가 의미 없게 되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편집인 뢰슬러 그라이헨은 “미래의 책은 멀티미디어 흐름에 점점 더 함유될 것이다. 사용자의 모든 활동을 기록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경향과 책을 결합한다면 책은 결국 ‘라이프 스트림(Life–stream)’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확장된(enhanced)’ 의미를 넘어선 ‘임베디드 전자책(embedded e-books)’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기존 종이책의 확장이 될지, 아니면 파괴를 통한 축소로 이어질지는 2012년 이후 출판시장에 참여 중인 이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양극화의 심화’도 빼놓을 수 없다.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의 상위권과 중위권의 판매 부수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주요 출판사의 종당 평균 부수가 모조리 하락했다는 분석도 있다. 돈 버는 출판사와 무너지는 출판사의 이질감도 더욱 커졌다. 이것이 예전과 다른 것은 습관적인 위기감이 아니라 2011년, 공포라는 현실로 얼굴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기자명 이홍 (리더스북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