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새 정부의 영어 정책이 온 국민을 ‘강남 학부모’로 만들 것이라는 염려가 커지고 있다. 위는 지난해 10월16일 한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실 영어 프로그램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모습.

2월1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측의 영어 공교육 정책 발표 이후 ‘사교육 시장이 들썩인다’는 보도가 여기저기서 쏟아졌지만, 웬일인지 이곳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규모가 꽤 커 보이는 한 영어유치원을 찾았다. 안내원에게 ‘한국말로’ 취재 요청을 하자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대여섯 살쯤 된 아이들. 미취학 아동부터 초등학교 6학년생까지 원생 총 300여 명을 가르치는 이 학원은 영어뿐만 아니라 수학, 과학, 음악 등 전 과목을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 몰입 교육’의 선두 주자다.

이 학원 박 아무개 상담실장은 ‘최근 달라진 점이 있느냐’고 묻자 “우리는 그간 하던 대로 하고 있고, 프로그램을 바꿀 이유가 없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들어보니, 자기들이 새 정부보다 앞서서 몰입 교육을 하고 있는데 뒤따라갈 일이 뭐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는 “여기는 진작 학원에 다 보내놓아서 학부모도 별 반응이 없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월 100만원이 넘는 ‘최고급 영어 사교육’을 하고 있는 학부모들에게 ‘오륀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대치동에 본원을 두고 있는 서울어학원의 이경로 원장의 말도 마찬가지였다. “기대하는 답이 아니겠지만 이쪽은 너무 조용하다.” 이 학원은 특목고 입시를 위한 토플 교육과 해외 유학 프로그램이 주력인 업체다.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학원 매매 전문업체 ‘아카데미119’ 조규철 대표의 이야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전반적으로 거래 시장이 활발하지만, 대치동만은 예외다”라고 전했다. “인수위의 새로운 교육 정책에 학원가가 크게 반기고 있다. 영어 전문 학원의 가격이 30% 정도 올랐으며, 내놓았던 매물을 급히 철회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다만 대치동만은 잠잠한 편인데 이미 큰 학원을 중심으로 ‘시장 재편’이 끝난 데다, 이미 외국에 나가 공부하거나 소수 정예 고액 과외를 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강남·분당은 이미 ‘영어 몰입 사회’

국내 최대 온라인 사교육 업체인 메가스터디 손은진 전무는 “강남·분당 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영어 몰입 사회’였다”라고 말한다. 이명박 당선자 측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어 회화가 가능하도록 하겠다, 영어 사교육이 없이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 영어를 할 줄 알면 인생이 달라진다며 나름 의욕적인 정책을 내놓았지만 이 지역 학부모에겐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강남과 분당은 영어 유치원에 보냈느냐, 유학이나 연수를 갔다 왔느냐, 영어 학원 내에서 아이가 어떤 ‘레벨’이냐가 학부모들의 주된 관심사가 된지 오래다. 그에 따라 자기의 사회적 위치와 수준이 결정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젠 단지 영어 실력 향상을 넘어, ‘세계인’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어하는 것 같다.”

손 전무는 이어 “메가스터디는 새 정부의 영어 공교육 정책이 이런 흐름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다른 지역 학부모가 따라하고 싶거나 따라갈 수밖에 없는 ‘영어 몰입 사회’의 풍경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남편이 대기업 간부이며 자기도 ‘작은’ 사업을 하고 있는 안 아무개씨(44). 서울 강남구 서초동 고급 아파트에 사는 그는 올여름 고1인 아들을 캐나다 교환 학생으로 보낼 예정이다. 1년 학비만 1000만원 이상 들어가지만 별 부담은 없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원래 보내려고 했다. 1년 정도 갔다 오면 말하기·듣기는 충분히 해결되리라고 본다.” 중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도 언젠가 유학을 보낼 생각인데 그 이유는 이랬다. “사실 둘째는 공부에 별 열의가 없다. 하지만 외국에 가서 영어를 익히면 나중에 최소한 여행사 정도는 운영할 수 있지 않겠나.”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의 10억원대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부 박 아무개씨(45)는 “이곳 학부모에겐 새 정부의 영어 교육 정책이 큰 이슈가 아닌 것 같다”라고 전한다. “대다수 아이들이 해외 유학·연수 등을 다녀와서 실력이 상당하다. 아무래도 비용 부담이 다른 곳보다 크지 않으니까.” 고1과 중2 두 딸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등에서 공부시킨 박씨는 “워낙 정책이 자주 바뀌니까 모든 걸 대비한다는 자세로 공부를 시키고 있다. 어학원에 보내고 있긴 한데 특별히 뭘 더 시킬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이사로서 연봉 6000만원 정도를 받는 김 아무개씨(40)는 안양시 평촌에서 8억원대 아파트에 살 정도로 재력을 갖췄다. 김씨도 ‘새 정부가 뭐라 하든 해오던 대로 할 생각’이다. “주변에서 워낙 많이 시키니까 좀 불안하긴 하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뒤처지는 꼴을 어떻게 보나. 하지만 ‘기러기 아빠’는 되기 싫으니 어쩌겠냐.” 김씨에겐 여덟 살, 네 살짜리 두 아들이 있는데 매월 영어 사교육비로만 200여 만원을 쓰고 있다. 해외 연수는 아이들이 좀더 크면 보내려고 한다.

"영어 못하면 사람 대접도 못 받는 세상"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한 주택가에서 만난 지 아무개씨(41)도 ‘액면으로는’ 평촌의 김씨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젠 영어를 못하면 대학 입학은커녕 사람 대접도 못 받는 것 아니냐.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의류 매장 점원으로 일하며 월 120만원를 버는 그에게 ‘대책의 수위’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 10만원짜리 보습학원에 보내고 있는데 그걸로는 턱도 없지 않나. 일단은 좀더 좋은 학원에 보내는 게 목표다.”
 

ⓒ시사IN 한향란말하기·쓰기 교육의 강화는 영어 유치원, 원어민 강사 교육의 수요를 늘릴 전망이다.

하지만 지씨 역시도 ‘마음만은’ 강남 학부모 못지않다. “솔직히 형편은 안 되지만, 미국에 있는 먼 친척에게 부탁해볼까 고민도 하고 있다. 얼마가 될지 모르나 학비 정도만 보내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한 어학연수 전문업체에 물어보니 미국의 경우 1년 학비만 최소 1600만원이 든다고 한다. 지씨의 1년 연봉보다 많은 액수다.

지씨의 경우처럼, 서민층과 중산층 내에는 비용·수준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한두 단계 높은 사교육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강남·분당 등지의 부유층에게는 이미 ‘일상’이 된 일이지만 이들에겐 이제 막 ‘사활’이 걸린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고양시 일산구 중산동에 사는 박 아무개 주부(38)는 “10살 난 아들에게 월 15만원이 드는 학습지 교육만 시키고 있는데 여력이 되면 해외 연수를 꼭 보내고 싶다”라고 토로한다. “원래는 꾸준히 학습지를 하면서 차츰차츰 단계를 높여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 영어로 수업을 하고 대학 입시에도 반영한다고 하지 않느냐. 말하기·듣기·쓰기까지 되어야 한다는데 그게 국내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루라도 더 빨리 확실한 교육을 해야 ‘중간’이라도 간다.” 박씨는 1년 학비가 900만원 정도로, 미국·캐나다에 비해 싼 호주 쪽으로 어학 연수를 알아보고 있다. 300만원이 조금 넘는 남편 월급 수준으로 ‘아들의 영어 수준’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이 초긴축 살림을 운영해야만 한다.

인천시 남동구에 사는 회사원 조 아무개씨(37)도 월 4만원짜리 가정방문 영어 교육 정도면 7살 난 아들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인수위의 발표 이후에는 주변에서 떠도는 고가의 그룹 과외나 조기 유학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다고 한다. “다들 하니까 불안해서 뭐든 할 수밖에 없다. 과거엔 한글을 깨우치고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이젠 영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지 않겠나.”

서민층 가운데는 뭐라도 해야 하는데 여력이 안 되다 보니,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ㅈ입시학원의 여 아무개 상담실장은 “학부모들이 관심은 보이는데, 강남처럼 뭐가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게 아니라 아주 막연한 수준이다. 학교나 학원에서 뭔가 대책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하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 지역 ㅇ어학원의 이 아무개 강사는 “고민은 하지만 워낙 먹고 살기가 바빠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학교가 학원을 이길 수 있을까

이명박 당선자 측은 “사교육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라며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을 내놓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강남·분당 등지의 부유층은 원래 하던 대로 엄청난 금액을 쏟아붓고 있으며, 중산층과 서민층은 사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조짐이다.

당선자 측도 이런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박형준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위원은 2월5일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영어 교육을 굉장히 강도 높게 시키려고 하나 보다. 사교육을 더 해야겠다’는 식으로 오도되는 과정이 있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게 학원이더라. 광고 전단을 뿌리고 해서 학부모의 눈을 그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프로파간다(선동)다”라며 사교육 업체 쪽에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이에 대해 사교육 종사자들은 한마디로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이다.

한 유명 입시학원의 간부는 이 당선자 측의 안일한 현실 인식을 이렇게 꼬집는다. “내년에 서울대를 구구단 암기로 뽑는다 해도 ‘최초 공개-구구단 광속으로 외우는 법’을 내놓으며 적응하는 게 사교육 업체다. 사교육 업체는 정책이 어떻게 변하든, 사생결단으로 달려들어 학부모의 불안을 조장해 기필코 의존하게 만든다.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만 앞세우고, 졸속으로 뭘 많이 내놓을수록 학원은 신이 난다. 학교는 학원의 반응 속도를 절대 따라올 수 없다.”

당선자 측은 ‘공교육’을 말하는데 많은 학부모가 ‘사교육’으로 향하고 있다. 당선자 측은 ‘영어 격차 해소를 위해 저소득층을 우선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저소득층은 정부가 아니라 ‘강남 학부모’를 바라보고 있다. 이젠 이들도 ‘입시’만 걱정하는 수준은 넘어선 듯하다. 앞서 만난 지 아무개씨의 말처럼 영어는 명실상부 ‘사람 대접’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기자명 고동우 기자·천관율 수습기자 다른기사 보기 intered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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