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둥성에서 온 양계영씨(42)는 요즘 신이 났다. 경기도 시흥시 다문화가족센터 책장에 모국어인 중국어로 된 책이 빼곡히 들어찼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즐겨 읽던 두보와 이백의 당시(唐詩)부터 〈삼국지〉 〈서유기〉 〈수호지〉 같은 고전이 중국 현지에서 최신판으로 입수됐다. 오랜만에 중국어 책을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발명가 에디슨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정독했을 정도다.

양씨의 업무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는 2011년 3월부터 시흥시 다문화가족센터에서 이중언어(결혼이민자 출신국 언어) 강사로 일한다. 중국인 어머니나 아버지를 둔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 한국에서 출판된 교재는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보기에 성에 차지 않았다.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직접 수집한 자료를 편집해 아이들 수준에 맞는 교재를 만드느라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기 일쑤였다.


ⓒ시사IN 조우혜양계영씨(왼쪽)는 중국 현지에서 들여온 책으로 딸 서진희양(오른쪽)에게 엄마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친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아름다운재단에서 중국책 280권을 센터로 보내오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최신 중국어를 잘 짜인 최신 교재로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자 위에 병음(중국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자모)이 하나하나 표기돼 있고 알록달록 삽화까지 풍부해 어린 학생이 읽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딸에게 엄마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수월해졌다. 양씨는 1996년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왔다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지금의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2000년에는 딸 서진희양(12)이 태어났다. 양씨는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딸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공장 잔업이 밤늦게 끝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진희양이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진희양은 “이상해” “안 배워”라며 중국어를 가르치려는 엄마를 뿌리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엄마 나라 책을 접하면서부터 변화가 생겼다. 양씨가 집에 빌려온 책을 읽어보면서 진희양이 중국어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국어 책 읽는 순간 스트레스 풀려

난민이나 이주노동자에게도 모국어로 된 책은 낯선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경기도 김포에 사는 초토 씨(30)는 책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말한다. 방글라데시 소수민족 줌마족인 초토 씨는 2007년 11월 방글라데시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초토 씨가 한국에서 방글라데시 공용어인 벵골어로 쓰인 책을 처음 읽은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2010년이었다. 초토 씨는 차크마어가 모국어이지만 벵골어도 읽고 쓸 줄 안다. 그는 그제야 한국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자신도 모르게 받던 긴장과 스트레스가 일순간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최근 초토 씨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인도의 결혼 지참금 제도의 문제점을 짚은 〈Dena Paona〉이다. 지참금을 준비하지 못한 채 결혼했던 신부가 신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은 사연이 담긴 책이다. 초토 씨는 “나는 이 책을 한국에서 읽으며 나의 정체성과 뿌리, 모국의 문화와 전통을 다시 떠올렸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김포에서 주방용품을 만드는 일을 하는 필리핀 사람 프레데릭 씨(34)도 요즘 타갈로그어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공장과 기숙사를 쳇바퀴처럼 오가는 일상이 지겨울 때면 김포 시내 이주노동자지원센터 ‘이웃살이’에 마련된 도서관을 찾는다. ‘이웃살이’는 지난해 아름다운재단에서 필리핀어·베트남어·타이어 도서 512권을 후원받았다. 이웃살이에서 활동하는 김민 예수회 수사는 “이주노동자가 있는 공장은 주로 시 외곽이나 산기슭에 있어서 여가 생활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 모국어 책을 구하기가 쉬워진다면 독서를 하면서 더 나은 문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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