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을 나서는데 모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인간 말종이 아니냐”라며, 막 끝난 영화 속 캐릭터를 향해 날선 단어를 뱉는 딸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어머니가 툭, 한마디 던졌다. “영화니까 그렇지.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겠니 설마.”

나머지 관객의 반응도 두 가지 중 하나일 확률이 높다. 분노하거나, ‘설마…’ 하며 고개를 젓거나. 정작 〈부러진 화살〉을 만든 정지영 감독(66)은 어깨를 으쓱한다. 말이 안 되지만 실제인데 어쩌겠느냐는 식의 담담한 말투다. 1월11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가 90%의 사실과 10%의 픽션으로 이루어졌다고 단언했다.

13년 만의 신작 〈부러진 화살〉은 이른바 석궁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수학과 입학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뒤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이야기다(〈시사IN〉 제183호 관련 기사 참조). 2007년, 교수 지위 확인 소송에서 패소한 데 불만을 품고 담당 판사의 자택을 찾아 ‘석궁 테러’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4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시사IN 백승기올해로 감독 데뷔 30주년을 맞은 정지영 감독.

2009년 가을, 정 감독은 배우 문성근씨가 사건을 다룬 르포 책 〈부러진 화살〉을 추천하기 전까지 사건 당사자를 ‘또라이’ 정도로 생각했다. 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쏜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석궁을 들고 간 건 맞지만 과연, 정말 쐈을까. 교수는 아니라고 주장했고 피해를 입은 판사는 맞다고 했다.

이 사건이 인상적이었던 건 당시 정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즈음, 그의 매형이 교통사고에 휘말렸다. 운전 중인 차가 버스를 들이받았다는 혐의를 받았는데, 매형은 억울해했다. 버스에 있는 블랙박스만 보면 될 일이었다. 증거물을 재판부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까지 갔지만 마찬가지였다. 정 감독은 몹시 간단하고 결정적인 증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 보고, 〈부러진 화살〉이 가능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블랙박스’ 구실을 하는 건 ‘혈흔’과 제목이기도 한 ‘부러진 화살’이다. 판사의 옷에 묻은 혈흔이 과연 실제 판사 것이 맞는지 감정을 요청하지만 재판부는 거절한다. 복부에 맞고 튕겨나갔다는 부러진 화살의 행방도 묘연했다. 재판은 여러 의혹을 풀지 못한 채 끝난다. 영화만 보면 대사처럼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다.

사건은 파면 팔수록 재미있었다. 서너 차례 김 교수 면회를 가고,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화화 의사를 밝히자, ‘뭐 그런 걸 물어보고 하냐’고 반문했다. 박훈 변호사도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정 감독 집에서 잘 정도로 가까워졌다. 판사에 밀리지 않고 법전을 공부해 일일이 대거리하는 수학 교수, 역시 만만치 않은 성정으로 그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 배우 안성기·박원상이 연기한 두 캐릭터가 영화를 끄는 가장 큰 힘이다. “법은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는 교수와 “법은 쓰레기다”라는 변호사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또 한 가지 흥행 동력이 될 만한 요소는 우리 사회 기저에 깔린,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다. 영화 속 악은 지나치리만치 극명하다. 문성근이 판사로 분했는데, 진보 인사의 ‘수구 꼴통’ 연기에 반전의 재미가 있다. 〈도가니〉에 이은 실화의 힘이 이 영화에도 담겼다. 대법원도 가세했다. 최근 여론을 의식해 전국 법원에 해당 소송의 판결문을 정리한 대응 매뉴얼을 발송하기도 했다.


감독 데뷔 30년 “가족에게 미안”

영화 시사회를 본 김명호 교수는 정 감독과의 통화에서 “같이 본 친구는 재밌다던데 난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 겪은 일이지만 영화적 상상력이 보태져 낯설 수밖에 없으리라는 짐작이다.


영화 〈부러진 화살〉(위)은 ‘석궁 사건’을 모티프로 했다. 재판은 여러 의혹을 풀지 못한 채 끝난다.

정 감독은 김 교수를 옹호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한 게 아니다. 그가 실제 인물인 김 교수에게서 읽은 건 ‘보수’였다. 원칙을 지키는 보수.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 탓에 ‘또라이’라 불리지만, 사소한 절차를 무시하는 재판부를 향해 원칙을 내세우는 그에게서 진정한 보수를 보았다. 김명호 전 교수는 현재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와 관련된 두 사람이 정치계 데뷔를 준비 중이다. 배우 문성근은 민주통합당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영화의 모델이 된 박훈 변호사는 총선을 앞두고 창원 지역 무소속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정지영 감독은 올해로 감독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30년이 된 줄, 기자가 말을 꺼내고서야 깨달았단다.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뒤 신인에서 중견, 중견에서 원로 감독으로 수식어가 달라졌다. 나이로 ‘원로’인 건 인정하지만 철이 늦게 들어, 여전히 청년의 마음이다. 그동안 〈남부군〉 〈하얀전쟁〉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등으로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도쿄국제영화제 대상 등 국내외에서 상을 받았다.

30년의 소회는 영광의 순간들에 대한 회상보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채워졌다. 본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지만 덩달아 가족이 고생을 했다. 걸핏하면 이사를 다니다가 최근에는 손위 동기 신세를 지고 있다. 젊은 시절, 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을 기회도 있었지만 영화작업에 방해가 돼 그만두었다.

〈까〉 이후 13년. 새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이 줄어만 갔다. 황금기를 함께하던 감독들도 메가폰을 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는 어디선가 계속 영화를 하고 있었다. 항일 독립투사인 김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아리랑〉을 구상한 지 8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은지화〉는 캐스팅 단계에서 어그러졌다.

1월19일 개봉하는 〈부러진 화살〉은 모처럼 예감이 좋다. 5억원의 저예산으로 제작한 영화, 배우들은 노 개런티를 선택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상영된 뒤 기립박수가 10여 분간 지속됐다. 정 감독은 그때도 무덤덤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이 왔으니까 예의상 나오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일반 시사회를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확신을 얻었다. ‘김영호’라는 캐릭터를 보면서 지금껏 부당한 권력에 소심했던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원로’라는 표현을 낯설어하는 정지영 감독도 ‘리얼리스트’라는 수식어는 긍정한다. 사실적인 모습을 그리려다보니 실제 사건에 관심이 많다. 자연히 정치·사회 문제에 앞장섰다. 스크린쿼터사수 비상대책위 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아 일간지 사회면에 자주 등장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영화인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한진중공업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데서 꼬장꼬장, 영화판과 세상에 할 말을 해온 그가 영화 속 ‘김영호’의 그림과 겹친다. 강인한 이미지와 달리 말투는 조곤조곤, 웃을 땐 소리보다 표정이 더 크다. “나는 그런 걸 외면하면 사는 재미가 없는 모양이야. 초연하게, 그래 세월아 가라 난 내 길 가니까, 이런 게 잘 안 돼요. 가만있으면 ‘쪽팔린’ 거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고.”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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