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 대사관은 2006년 7월~2009년 10월 남북정상회담, 북한 미사일 발사, 남북경협 등 한반도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총 81명의 국내 고위 인사를 만나 정보와 의견을 듣고 협의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세계적인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지난해 8월30일 공개한 주한 미국 대사관 비밀 외교 전문 총 1980건 중 한반도 대북 문제 관련 문건 126건을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126건 중 대북과 관련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대사관이 작성한 문건이 47건이고 나머지는 평상시 대사관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을 기록한 문건 79건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당시 접촉한 인사들은 청와대·외교통상부·통일부 등 남북관계의 핵심 관료 그룹과, 국회의원·대학교수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그룹, 남북경제협력과 관련된 기업 책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스티븐스 주한 미국 대사(오른쪽)와 이명박 대통령.

비밀 외교 전문을 작성한 사람은 19대 주한 미국 대사인 알렉산더 버시바우(2005년 10월~2008년 10월)와 20대 주한 미국 대사인 캐슬린 스티븐스(2008년 10월~2011년 11월)였다. 이 외에도 공관 차석인 패트릭 라인한, 윌리엄 스탠턴, 정무공사인 조지프 윤, 브라이언 맥피터스 등이었다.

북한 관련 주요 이슈가 터졌을 때, 미국 대사관은 남한의 고위 인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제일 많이 접촉한 인사는 누구였을까?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 2006년 7월부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된 2009년 10월까지 주한 미국 대사관이 만났던 81명(중복 포함)과 대화 내용을 주요 이슈별로 추적해보았다.


■무슨 얘기를 주로 나눴을까

2006년 7월~2009년 10월 미국 대사관은 총 46차례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최고위 관료를 만나 대북 문제에 대해 정보와 의견을 듣고 협의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31차례, 이명박 정부에서는 15차례였다. 노무현 정부에서의 접촉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 두 배가 넘는다. 주요 사안이 발생하면 어김없이 접촉 빈도가 높아졌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2006년 7월5일), 제19차~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 1차 핵실험(2006년 10월9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2007년 10월2일) 등 주요 사건이 일어났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북한 군인에 의한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2008년 7월11일), 남북 육로통행제한 조처(2008년 12월1일), 미국 여기자 2명 억류 사건(2009년 3월17일),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의 방북(2009년 8월10일), 금강산 남북적십자회담(2009년 8월26일) 등의 시기에 개성공단의 접근제한 문제 등을 주로 논의했다. 대포동 미사일 2호 발사(2009년 4월5일), 북한 2차 핵실험(2009년 5월25일) 때는 유엔안보리 결의안에 대한 한·미 공조를 확인하기도 했다.


 
31차례에 걸친 미국 대사관과 노무현 정부의 접촉 중에서 남북회담에 관한 논의는 21회로, 전체의 67.7%를 차지했다. 조사 대상 기간에 참여정부에서 장관급 이상의 남북회담은 총 5회(정상회담 1회, 장관급회담 3회, 국무총리회담 1회) 이뤄졌다. 미국 대사관은 주로 한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통해 회담 개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전 방위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관계자는 지난해 12월5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남북) 장관급회담은 정례 회담이기도 하고, 의제가 해당 국가 대사관과 특별한 관련이 없는 한 통일부의 공식 발표를 통해서 대사관이 알게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정상회담의 경우도 백악관에는 회담을 추진한다는 사실이 사전에 통지되지만 미국 대사관은 이를 몰랐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남북회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접촉 빈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회담과 관련해 정부 관료들과 접촉한 것은 세 번이었다. 세 번 모두 2009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 이후, 남북 간 대화 기류가 조성되기를 바라는 통일부 당국자들과의 대화였다.


■누구를 주로 만났을까

미국 대사관은 남북회담에 관한 고급 정보를 주로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에서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고급 정보 중에는 최고위 관료층이 주도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대사관은 회담 정보를 얻으려고 청와대 인사들과 4회, 외교통상부 인사들과 5회 접촉했다. 주무 부처인 통일부와도 12차례 접촉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관료 중 미국 대사관과 만난 사람은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과 박선원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 대사관과 2차례씩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박선원 비서관은 청와대 비선조직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미국 대사관에 알려준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2006년 7월에 열린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된 것과 관련해 당시 청와대 내에 두 가지 견해가 대립했다는 배경을 설명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공동취재단2007년 10월2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취재진은 박선원 전 비서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박 전 비서관은 “바빠서 시간을 내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외교통상부 관료 중에서는 반기문·송민순 장관과 조중표 제1차관, 임성남 북핵외교기획단장, 조병제 북미국 국장을 만났다. 이 밖에도 미국 대사관은 통일부와 12차례 접촉해 남북회담과 관련된 내용을 전달받았다.


■노무현 정부, 대북 제재 반대

안보 관련 접촉은 어떠했을까.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그해 10월 핵실험 이후, 미국 대사관은 대북 제재를 놓고 노무현 정부 관료들과 10차례 접촉했다. 모두 외교통상부와 청와대 고위급 관료와의 만남이었다.

이 시기에 노무현 정부는 대북 제재와 관련해 미국 정부와 의견 차이를 보였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때는 북한에 대한 군사 제재를 놓고 미국·일본과 대립했고, 핵실험 때는 대북 제재 결의안에 금강산 관광 중단을 포함할 것인지를 두고 미국과 견해 차이를 보였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관료들을 만나 미국의 노선을 따르도록 설득하고 압박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이후 북한에 대한 군사 제재를 반대하며 이를 끝까지 관철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북한 핵실험 직후 금강산 사업과 대북 제재를 연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최소한의 양보(중고교 학생들의 금강산 수학여행에 대한 정부지원금 중단)만 하고 금강산 관광을 유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대사관은 외교통상부 관료들과 6회 만났다. 반기문 장관(2회), 조태용 북미국장, 박인국 외교정책실장, 이용준 북핵외교기획단장, 이혁 아태국장과 접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 관료들과는 총 4회로 송민순 외교안보실장(2회), 임성남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보좌관, 박선원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을 만났다.

반면 이명박 정부의 경우,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이후 미국 대사관은 정부 고위 관료들과 6차례 만나 유엔 대북 제재 결의안에 대한 한·미 공조를 확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에서는 김성환 외교안보수석과 위성락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위원장, 황준국 북핵기획단장을 만났다. 이 외에도 김숙 국가정보원 제1차장과 통일부의 엄종식 남북회담본부장을 만난 것이 눈에 띈다.

특히 대북 제재에 대한 의견 차이로 청와대와 네 번이나 접촉했던 노무현 정부 때와는 달리, (이명박 정부 들어) 청와대와의 논의는 한 건에 불과했다. 내용 또한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찬성한다는 것이어서 큰 의견 차이 없이 한·미 공조를 보여준 것으로 드러났다.

정권별로 미국 대사관과 관료들이 접촉한 횟수가 이처럼 다른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동영 민주통합당 의원과 한승동 〈한겨레〉 논설위원은 이 같은 차이가 한·미 관계에서의 협력과 갈등 정도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정동영 의원은 “이명박 정권은 북한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견해가 비슷하므로 (미국 대사관과) 많이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권별로 미국 대사관과 접촉한 횟수가 차이가 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한승동 〈한겨레〉 논설위원도 “정권에 따라 미국과 갈등 혹은 협력의 차이가 나는 것이 일본과 비슷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미 관계가 불편했던 것과 같이 일본도 민주당 정권교체 이후 미국 정부와 갈등이 더 잦았다”라고 말했다.


■개성공단 둘러싼 정부 간 견해차도 문건에 드러나

미국 대사관은 2008년 12월1일 북한의 남북 육로통행 제한조처 및 2009년 3월 북한의 개성공단 접근 제한조처와 관련해 이명박 정부 관료들을 5차례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공동취재단주한 외국 기업인이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이후 한국은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12월 북한은 남북대화 단절을 골자로 한 ‘12·1 조처’를 단행했다. 이는 남북 간 육로통행 제한, 개성공단 상주인원 감축, 남북 간 철도운행과 개성관광 중단 등을 가져왔다.

‘12·1 조처’ 이후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은 고사(枯死) 직전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남측 체류 인력이 감소해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출입제한 조처가 지속되면서 개성공단이 점차 활기를 잃고 있었다.

이 같은 개성공단 내의 인력 부족 문제에 대해 미국 대사관은 익명의 청와대 관료와 김기웅 통일부 개성공단지원총괄팀장을 만나 한국 정부의 견해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와 통일부의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김기웅 팀장은 2008년 3월3일 “개성공단에 대한 통일부의 핵심 안건(key issue)은 개성공단에 더 많은 여성 근로자를 데리고 오는 것이다. 여성 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개성공단 안에 기숙사를 짓는 것을 포함한 다양한 방안을 검토 중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당 문건에서 익명의 청와대 당국자는 “개성공단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기숙사 건축은 남북대화가 재개되는 조건하에서 고려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백악관은 알고 미국 대사관은 몰랐던 남북정상회담 추진

2007년 2월13일 베이징 합의와 더불어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2·13 베이징 합의는 북한이 ‘핵시설 폐쇄 봉인과 불능화 및 신고’를 이행하면 합의에 참여한 6자회담 당사국 5개국(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이 중유 100만t 상당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약속한 합의다. 이후 2007년 8월8일 노무현 정부는 8월28일부터 30일까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고 언론 보도를 통해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추진 초기부터 이 사실을 알았던 백악관과 달리 미국 대사관은 청와대의 정상회담 발표 뒤에야 이를 확인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2007년 3월 이해찬 의원이 방북할 당시 정상회담 논의가 이뤄졌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공식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추진 사실을 몰랐다. 이 때문에 정상회담 발표 이후 대사관이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미국 대사관은 한국 정부의 발표 이후에야 이해찬 의원과 함께 방북했던 이화영 의원을 만나 회담과 관련된 정보를 들은 것으로 확인된다.

2007년 8월8일, 갑작스레 발표된 회담 소식에 주한 미국 대사관은 관련 정보를 얻으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한 미국 대사의 초반 접촉 움직임은 청와대 내 친노 계열로 집중된다. 8월16일 미국 대사관 정무공사 조지프 윤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이날 미국 대사관은 외교통상부·통일부 관료가 아닌 당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인 이화영 의원과 김종률 의원을 만났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당시 초선 의원이었다.

왜 노무현의 측근을 만난 것일까. 주한 미국 대사관이 이들을 만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면 시간을 거슬러 2007년 3월14일 이해찬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와 버시바우 대사의 만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사가 작성한 3월15일 문서에는 당시 북한을 다녀온 이해찬 의원과의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버시바우 대사는 이해찬 의원에게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이 의원은 “나는 공식적인 대북특사가 아니기 때문에 남북정상회담 관련 논의는 하지 않았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문서의 논평에서 버시바우 대사는 “이해찬 의원은 부인했지만, 그가 북측과 남북정상회담을 논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대사는 이해찬 의원이 북한과 정상회담 관련 논의를 하고 왔으리라 추측했다.

이화영 전 의원과의 인터뷰 결과, 버시바우 대사의 추측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화영 전 의원은 지난해 12월7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당시 북한 핵실험으로 인해 남북 간 공식 접촉이 모두 막혀 있는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정상회담 추진 뜻을 전하기 위해 20여 차례 북한에 다녀왔다”라고 밝혔다. 그는 “2006년 10월 핵 실험이 있은 뒤, 12월16일 노 대통령의 지시로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 개최 의사를 전했다”라며, 노 대통령이 이 의원에게 “공식 접촉이 막혀 있으니 정부 사람을 포함시키지 말고 평양에 가서 정상회담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고도 밝혔다. 결국 버시바우 대사의 추측은 정확했지만, 실제로 대사관은 정상회담 발표 이후에야 당시 이해찬 의원과 같이 방북했던 국회의원들을 만났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고위 당국자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수뇌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김만복 국정원장이 첫 방북 때부터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라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미국 수뇌부는 정상회담 추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 대사관은 이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대사관이 한국 정부에 항의한 것으로 안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이동권(서강대 신문방송학과 3년)·김휘연(신문방송학과 4년)·김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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