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예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소재 중 하나가 몸이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몸은 없다. 이 몸은 병들고 뚱뚱하고 불완전하고 냄새를 풍기는 ‘보기 싫은’ 몸이다. ‘혐오 미술(abject art)’은 매일 몸이 내놓는 배설물, 즉 오줌·똥 혹은 생리혈이나 정액까지도 소재로 삼고 관객의 구토와 혐오를 유발한다. 죽음을 지운 몸은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유도하지만, 유한한 몸은 삶의 고통과 슬픔을 보존한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몸은 질병·오염·고통·불안·슬픔·부패·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을 연상시키면서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우리는 결국 건강·완치·청결·박멸·미모를 산다. 필멸의 삶을 부정하는 데 우리는 너무 많은 돈을 벌고 쓴다. 자신의 몸을 잃고 인공의 몸을 얻기 위해 돈을 벌고 지불하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우리는 너무 많이 웃고 너무 긍정적이고 너무 밝게 희망에 차서 정작 이 몸, 더럽고 냄새나고 고통을 겪는 몸과 대화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슬픔·우울·절망·고통이나 상처와 같은 몸의 말을 알아듣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닐까.

혐오 미술은 있는 그대로의 몸, 살아 있는 몸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삶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그러나 아름답고 이상적인 몸으로 도피하지 말라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중간 지대로서의 몸을 견디라고 설득한다. 나는 ‘견딘다’라는 말을 ‘사랑한다’는 말로 번역하겠다. 혐오스러운 것과의 동거, 화해할 수 없는 것과의 공생. 그것이 당신의 몸에 깃들인 삶의 어려움인데, 그 어려움을 부정한다면 당신은 당신을 증오하고 당신을 제거하는 전쟁에 가담해야 할 것이다. 


서울대 퀴어 동아리 QIS가 만든 포스터에 동성애 반대 문구를 찍은 미대 졸업 작품(왼쪽). QIS는 이 작품이 걸린 전시회장에 교정에서 주운 쓰레기로 만든 화환을 보냈다(오른쪽).

혐오 미술 등 ‘보디 아트’가 말하는 것

혐오 미술을 비롯한 ‘보디 아트’는 내게 그래서 예술이 줄곧 견지한 사랑의 시학의 동시대 버전이다. 역겹고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것, 당신 혹은 우리를 받아들이라고, 그것이 증오와 자본이 결탁한 전쟁에 맞서는 태도라고 호소한다. 아름답고 예쁘고 ‘시크하고 쿨하고 간지 나는’, 턱선이 예쁜 당신은 내겐 우울하고 위험하고 공허한 사람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이 위험에 빠져 있고 무력하고 약하고 어쩌면 악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려면 우리는 어둡고 더럽고 슬프고 그래서 인간적인 관계를 떠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나를 일부 잃어야 가능한 실천이고 긍정이다. 나와 당신의 교집합은 내가 일부 사라지면서 만들어지는 공터로 당신을 맞아들일 때 형성되고,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그 ‘섬’일지 모른다. 나는 당신이 화해하지 못한 채 자꾸 지우고 죽이고 있는 당신의 몸을 사랑하길, 그래서 증오와 전쟁을 정당화하는 언어들-건강·청결·박멸·완치와 같은-에 포획되지 않는 삶 혹은 사랑의 출발점일 수 있기를 말하는 중이다.

내가 강의를 하는 서울대에서 12월 초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미대 디자인 전공 학부생 하나가 졸업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 호모포비아적인 혐오를 드러낸 것인데,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의 정황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지난해 10월께 퀴어(동성애자) 동아리인 QIS는 ‘게이가 어때서?’ ‘레즈가 어때서?’ ‘니 옆에 나 있다’ ‘We are all queer in someway’와 같은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학내 게시판에 붙였다. 그 학생은 포스터 한쪽에 ‘how could your life be created(당신의 삶은 어떻게 창조되었나)?’라는 문구와 이성애를 상징하는 기호를 스탬프로 찍어 이를 〈이성애 권장-반동성애 캠페인〉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전시에 출품한 것이다. 그 학생의 작업은 2학기 내내 진행된 전공 수업인 ‘브랜딩-CI’란 수업의 결과물로, 담당 교수는 학생들의 생각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학생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했다고 보인다.

레즈비언 사진작가인 로라 아귈라의 〈자화상〉.

QIS의 항의에 해당 학생이 제출한 공식 사과문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어린 자신의 무지와 자신의 선의가 ‘본의 아니게’ 타인의 불쾌감을 자극한 것에 대한 용서를 비는 내용이다. QIS는 현재 성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폭력을 묵인한 디자인학부 교수들의 공식 사과와 해당 학생의 졸업 자격 철회를 요구하지만 디자인학부 측은 아무런 의견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12월2일에 시작한 졸업 전시는 12월12일에 끝났다. QIS는 전시회장에 교정에서 주운 쓰레기로 만든 화환을 보낸 것으로 안다. 알려진 바로는 기독교도인 학생은 자신의 종교가 ‘가르친’ 그대로 이성애주의적 확신에 근거하여 문화적 기형이나 자연적 ‘질병’임이 분명한 동성애자들을 치유하고자, 그러니까 질병으로서의 동성애를 박멸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사건은 학내 성 소수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에 대한 인정이건 부정이건 많은 담론을 고취했다는 점에서 작은 성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해당 학생의 작업이 ‘미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내용 수정을 요구할 수 없다’라는 디자인학부 교수들 측의 태도에 황망하다. 동시대 예술이 구사하는 ‘차용’이나 ‘패러디’ 같은 미적 전략에 대한 완전한 오해를 입증하는 학생만큼이나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인데, 차라리 QIS가 보낸 쓰레기 화환이 패러디를 실천한 ‘작품’으로 보인다.

대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이며 동시에 ‘비판적 능력’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는 힘’을 기르는 예외적 장소라는 모순된 속성을 갖는다. 우리는 대학에서 자신의 말·눈 가리개를 더 견고하게 할 수도, 자신의 견고한 외피를 벗고 세상으로 나가는 힘을 기를 수도  있다. 자신의 종교적 확신을 예술로 표출한 학생은, 그렇다면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던 셈 아닌가. 그는 대학에서 상실의 경험, 가벼워지고 가난해지면서 동시에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도그마적 확신이 너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는 고통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마디로 아프지 않았다.

증오는 쉽다. 증오는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게 만들고 나의 행복과 평화는 너의 색출과 박멸로 가능하다고 알려주니까. 사랑은 어렵고 냄새나고 고통스럽다. 그것은 내가 견딜 수 없는 것과 공생하는 것이 삶이라고 요구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기란 쉽다. 

존중받아야 하는 사랑

지금껏 내가 ‘배운’ 바로는 퀴어들에게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세상의 명예와 부, 그리고 그것을 위한 전쟁을 좇는 삶이 무의미하다. 나는 나의 퀴어 친구들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든 시이거나 음악이었다. 그들이 왜 총을 들기 싫어서 국가를 버리는지, 왜 전쟁 말고 사랑을 외치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알게 되었고 그래서 조금 더 사랑을 존중하게 되었다.

QIS가 보낸 화환을 나는 ‘우리는 쓰레기이고 우리는 더럽고, 그래서 우리는 꽃이다’로 번역한다. 그것은 꽃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찬란함의 은유를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낮은 것과 접합한 자가 찾아낸 삶에 대한 긍정이다. 당신은 어떻게 읽히는가? 연인과 자신 둘 다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고 당국의 보호와 감시하에 살아간다며, “만약 우리가 ‘질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헤어졌겠지”란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는, 한 학생의 쪽지를 수업 끝에 받은 뒤 내가 그들의 사랑이 부럽고 아파서 울었듯이, 당신도 가만가만 불치병에 걸린 몸, 죽음을 끌고 사는 몸, 보잘것없는 몸을 어루만지며 울었으면 좋겠다. 아파도 못생겨도 뚱뚱해도 학대당해도 울어도 괜찮아, 괜찮아.

기자명 양효실 (서울대 강사·미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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