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춥긴 추운 모양이다. 인터넷에서는 연일 한파와 관련된 기사가 화제고, SNS에서 마주치는 지인들도 돌아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라며 한마디씩 한다. 지난 11월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한 달이 다 되도록 남미를 헤매고 다닌 탓에, 추위보다는 더위와 습도에 몸이 적응되어 있는 필자로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귀국을 위해 잠시 들른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의 밤공기가 춥게 느껴질 정도이니,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짐 찾자마자 창피함과 냄새는 잠시 접어둔 채 가지고 있는 모든 옷을 꺼내 겹겹이 껴입고 나가야 할 모양이다.

하지만 추위가 꺼려지는 손님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코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아리고, 자기도 모르게 발을 동동거릴 정도가 되면 제맛이 나는 술이라는 것이 또 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PD 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은 참 다르면서 또 비슷하다는 것이다. 전혀 다르게 보이는 사람들이 비슷한 환경에 처하면 비슷한 것을 생각해낸다. 저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술을 만들고, 점차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맞춰 다양한 음용 방법을 만들어낸다. 알프스건 히말라야건 안데스건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비슷하다.
 

ⓒ탁재형 그림추운 고산지대에 있는 네팔 랑탕의 숙소. 네팔 전통주 럭시를 탄 무스탕 커피가 난로에서 끓고 있다.

 


‘아, 이놈의 추위…. 몸도 으슬으슬 떨리고… 한잔 마시면 몸이 확 풀리면서 기분 좋게 노곤해지는… 뭐 그런 거 어디 없을까?’

이건 겨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문제일 텐데, 고민 내용이 보편적이니만큼 제시된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글(〈시사IN〉 제222호)에서 다뤘던 베네수엘라의 칼렌다디토(Calendadito)도 그중 하나다. 원래 칼렌다디토는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안데스 산맥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 메리다는 적도 인근이라고는 해도, 아침저녁 일교차가 상당히 크다. 커피 농부들이 사는 집이 난방이 잘 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침에 일어나 일을 나가려면 짧은 시간 안에 몸을 덥힐 뭔가가 필요했다. 바로 그것이 커피에 사탕수수 술 미체를 섞은 칼렌다디토였다.

히말라야에 가도 비슷한 것을 접할 수 있다. 네팔 랑탕 지역의 8월은 매일같이 비가 오는 계절이다. 해발 4700m의 고산 호수에서 벌어지는 힌두교 축제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취재 시기로는 최악이었다. 매일같이 비를 맞으며 5시간 넘게 걷다보면, ○○텍스가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고 해도 배겨낼 장사가 없기 마련이다. 늘 속옷까지 흠뻑 젖은 채로 숙소에 도착하면, 젖은 옷을 벗어서 난롯가에 말려놓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주인장에게 말하곤 했다.

“무… 무스탕 커피 지금 되나요?”

 

 

 

 

ⓒ탁재형 제공스위스 마터호른 지역의 얼음 호텔 ‘이글루 도르프’에서 숙박객들이 글뤼바인을 마시는 모습.

 

무스탕 커피는 이름대로 네팔의 무스탕 지역에서 유래한 것인데, 커피에 설탕, 야크(히말라야 고원지대에 사는 야생 소)의 젖으로 만든 버터, 그리고 네팔의 전통술 럭시를 탄 것이다. 달콤하고 부드럽고 뜨겁고 얼큰한 그 액체가 혈관에 퍼질 때의 느낌은, 추위와 피로로 절박해져본 사람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보상이다. 담요를 둘러쓰고 난롯가에 앉아서 무스탕 커피를 홀짝이다보면, 다음 날 걸어야 하는 빗길도 어떻게 해볼 만할 거라고 느껴졌다.


얼음 호텔에선 술을 흘리면 안 돼

알프스에도 커피가 있고 술이 있는데, 사람들이 그냥 있을 리 만무하다. 독일과 스위스의 산악 지역에서는 슈납스 카페(Schnaps Kaffee)를 마시는데, 이것은 커피에 배나 자두, 체리로 만든 증류주인 슈납스를 탄 것이다. 야외에서 벌어지는 각종 마을축제 때 반드시 등장하는 메뉴인데, 축제는 즐겁지만 몸이 얼어붙고 손발이 곱아서 한숨 돌려야겠다 싶을 때 어김없이 찾게 된다.

이와 함께 글뤼바인(Gluhwein)도 빼놓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독일과 스위스 전역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각종 공예품과 먹을거리를 파는 시장)이 열린다. 시장 한쪽에서 마치 마녀가 끓이는 비밀의 약처럼 둥근 솥단지 안에 무럭무럭 김을 내뿜고 있는 것이 바로 글뤼바인인데, 이것은 와인에 오렌지와 레몬, 계피, 정향 등을 넣고 약한 불에서 끓인 것이다. 가열하는 정도에 따라 알코올 성분을 거의 모두 날아가게 할 수도 있고(이런 경우 아이들도 즐겨 마신다), 끓인다기보다 덥히는 정도로 천천히 가열하면 알코올 도수를 거의 그대로 유지시킬 수도 있다. 적당히 졸아들어서 뭉근해진 글뤼바인을 마시다보면, 잔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곱은 손이 펴지고, 아까 못 들어가본 골목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릴 힘이 생기곤 했다.

 

 

 

 

 

 

ⓒ탁재형 제공스독일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글뤼바인이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다.

 

 

글뤼바인을 마셨던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스위스 마터호른 지역의 얼음 호텔 ‘이글루 도르프’를 방문했을 때이다. 겨울철 6개월 동안만 운영되는 이글루 도르프는 모든 것이 얼음과 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침실과 화장실은 물론이고 내부에 만들어진 바도 마찬가지다. 이 바에서도 글뤼바인을 파는데, 마실 때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글뤼바인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것. 당연한 이치다. 호텔이 ‘녹아버리니까’. 머리카락은 얼어서 바삭거릴 정도인데, 뜨거운 글뤼바인을 들고 혹여 바닥에 한 방울이라도 흘릴세라 후후 불어가며 마시던 그 순간만큼 손안의 술잔에 집중했던 적도 또 없었던 것 같다.

향긋한 칼렌다디토든, 부드러우면서도 얼큰한 무스탕 커피든, 달콤하고 진한 글뤼바인이든, 겨울철 술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몸이 얼어붙고 뭔가 따뜻한 것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술 한 모금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적당한 정도의 시련은 그 뒤에 따라오는 성취를 더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무대장치와도 같은 것 아닐까. 비록 나에겐 집에 가서 글뤼바인을 끓이기 전에 여름옷을 껴입고 인천공항의 추위를 뚫을 일이 남아 있지만 말이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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