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전설적인 편집자였던 이영준씨(왼쪽)는 홀연히 유학을 떠나 하버드 대학에서 시인 김수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낭만 세대 편집자’라고 하면 뚱딴지 같은 소리일까. 전 민음사 주간 이영준씨에게는 이 표현이 맞춤하다. 그는 한가하게 일하는 듯하면서도 풍성한 성과를 쏟아내는 편집자로 명성이 짜르르했다. 10년 전 미국으로 홀연히 유학을 떠난 그는 시인 김수영 연구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이영준씨가 일을 냈다. 미국에서 영문 한국 문화 잡지 〈아젤리아〉(Azalea) 제작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발행처는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년에 한 번 발간되며, 국제교류진흥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는다. 창간호를 인쇄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그를 만났다. 가제본 상태의 책을 펼쳐 보여주는 그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학생들에게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면 눈을 반짝인다. 통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박찬욱 감독, 이창동 감독, 가수 박진영을 접하면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그들의 갈증을 제대로 채워주기 위해서는 텍스트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관련 텍스트는 고전 일색인 데다 번역의 질도 아쉽다. 언제까지 기와집 보여주고, 1920~30년대 한국 소설을 한국 문화의 정수로 내세울 것인가. 〈아젤리아〉는 역동적인 한국 문화의 현장을 보여주는 마당이 될 것이다.”

책의 목차를 넘겨보았다. 김영하의 대표작을 번역한 특집이 맨 앞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비롯해 김중혁·하성란·성석제·윤대녕·박민규·이혜경의 소설이 눈에 띈다. 이창동 감독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꿈꾸는 짐승〉도 번역되어 있다. 김원숙의 그림, 강홍구의 사진, 그리고 한국전 참전 군인인 조 사비츠키의 사진 10여 점이 눈길을 잡아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 진보하고 있다”

문학과 사진, 그림 등이 다채롭게 소화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아젤리아〉는 한국 문학이 중심이었다. 젊은 작가들이 전진 배치된 것이 신선하고 반가웠다. 그는 “이른바 노벨상 후보군 작가의 작품을 많이 소화하고, 기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분위기가 있었다. 노벨상 타는 데에 기여하라는 것이다. 그 바람을 이해하지만 나는 이 매체의 역할을 좀 다르게 보고 있다. 지금 한국의 감수성이 생생하고 풍요롭게 드러나는 마당을 만들고 싶다”라고 말했다.

위는 〈아젤리아〉 창간호.
외국의 스타 필진으로부터 글을 받은 것도, 그의 마케팅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로널드 슐레스키는 황석영 소설 〈손님〉에 대한 리뷰를 실었다.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방문기를 쓴, 2006년 노벨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과 ‘만해 한용운’론을 쓴 미국 시인 로버트 핀스키의 이름은 미국 독자들의 눈을 잡아끌 것이다.

현재 한국 문학과 문화에 대한 그의 평가는 퍽 후했다. 비로소 자신이 느낀 대로 한글로 표현할 줄 아는 세대가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오히려 품위 있게 한국 문학을 설명하는 능력이 처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혐의를 품고 있다. 시쳇말로 외국에서 한국 문학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창작자보다 평론가가 더 분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는 명성이 확립된 시인들 위주로 수록되었다. 김지하, 고은, 이시영, 마종기, 황지우, 김혜순 등. 황인숙과 이문재, 허수경 정도가 가장 막내급이었다. 편집인인 데이비드 매켄 교수가 소월 시를 전공한 흔적이다.

ⓒ시사IN 한향란지난 9월12일 작품이 게재된 작가들이 한데 모였다. 시인 김지하부터 막내 격인 소설가 김애란까지 오랜만에 문화계 신구 세대가 무릎을 맞댔다.
한 출판 편집자는 이영준 하면 ‘너른 품’이 절로 떠오른다고 말했다. 출판계에서 이영준씨는 바둑 잘 두는 사람, 책 인심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은 한 50권쯤 달라고 한다. 그래도 책을 한 권 가져가면 그 열 배 몫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라며 껄껄 웃었다.

그가 전설적인 편집자로서의 명성을 얻은 것은, 단순히 덕성으로 작가들을 다수 포섭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변화하는 시류를 발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수완 좋은 편집자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 10여 년 전 큰 출판사들이 다양한 색깔의 작은 출판사를 늘리면서 외연을 확장하던 시기에 그는 민음사의 자회사인 황금가지 출판사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인품’이 경쟁력인 그이지만, 그가 유독 까칠해지는 대목이 있었다. 번역 얘기가 나올 때였다. 그는 영문 번역의 질에 대해서 판갈이론 수준의 ‘극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도 그의 이번 한국 나들이는 단순히 〈아젤리아〉 인쇄를 위한 것만은 아닌 것으로 비쳤다. 머지않은 시기에, ‘낭만 세대 편집자’의 귀환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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