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둘러싼 의문이 풀릴까. 북한 측 발표대로라면 김 위원장 사인은 12월17일 오전 8시30분 ‘중증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 합병’에 의한 것이다. 일부 언론이 그의 사망 시기와 원인을 둘러싸고 괴담 수준의 얘기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규명하기 어렵다. 문제는 북한의 발표대로 해도 의문이 남는다는 점이다. 1년에 몇 차례씩 중국을 방문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등 뇌졸중 후유증을 극복하고 건강을 회복해 권력 승계도 늦춰졌다고까지 얘기되던 그가 왜 이토록 갑자기 사망했나.

그 해답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모르핀이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다가 회복한 김 위원장이 그 뒤로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을 상습적으로 투여해왔다는 것이다. 기자는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배경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복수의 취재원으로부터 이 얘기를 들었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A씨는 “2008년 모르핀 사용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이런 날은 언제든지 올 수 있었다”라며 북한 권력 내부에서 “그가 얼마나 견딜지 지켜보는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김정은에게 권력 이양을 서두른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다. 또 다른 취재원 B씨는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이로부터 최근 김 위원장이 모르핀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전했다.


모르핀 투여가 영향 미쳤나

모르핀은 마약성 진통제로 천연물질 중에서 진통작용이 가장 강하다. 김 위원장은 2006년께부터 당뇨병과 간질환, 심장질환으로 국정 운영에 지장을 받아왔는데, 2008년 뇌졸중을 겪은 뒤 2009년부터는 만성신부전증에 시달려왔다. 일반적으로 신부전 환자는 1주일에 2회 이상 혈액투석이 가능하지만 김 위원장은 심장질환 때문에 2주일에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연합뉴스〉 12월19일자). 이 때문에 김 위원장이 그 사이의 공백을 모르핀으로 메웠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르핀을 상습적으로 사용하면 언제 갑자기 목숨을 잃을지 모를 정도로 위험해진다. 술·담배는 물론이고 과로도 절대 금물인데, 2008년 쓰러진 이후 술·담배를 끊고 절제하던 그가 올해 들어 이를 다시 시작했고 사망하기 직전에는 북·미 대화를 진두지휘하느라 과로까지 겹쳤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미 대화는 김정은 소관이 아니라 김 위원장이 주도해왔다. 모든 일정을 보고받고 지시하고 마지막 결정을 직접 내렸다. 과로가 없을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AP Photo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에서 네 번째)과 북한 수뇌부가 12월20일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전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후계 구도는 일단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는 듯하다. 물론 이 안정기가 어느 시점까지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김정은으로의 승계가 무난하게 이뤄질 것이며, 대체로 1년 정도는 내부 분란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아직 세상 경험이 일천한 20대 후반 젊은 후계자의 등장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례적으로 후한 평가다. 그만큼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쓰러지고 난 이후 언제 닥칠지 모를 자신의 사후에 대비한 기획을 철저히 해왔고, 당분간은 그가 세운 각본대로 진행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영화광에다 ‘시나리오형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김 위원장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세운 최후의 기획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 듯하다. 첫 단계는 자신의 후계자로 3남인 정은을 발탁함과 동시에 그 호위 세력인 신진 군부세력의 총구로 장성택을 비롯한 군의 원로그룹, 그리고 당 중앙위까지 제압하게 한 과정이다. 두 번째는 2009년 헌법 개정과 핵실험을 통해 이들 군부의 선군사상을 헌법적 지도이념으로 격상하고 핵 무장화를 추진한 과정, 마지막 세 번째로는 2010년 9월의 당 규약 개정으로 당 중앙군사위원회를 부활시켜 김정은과 신진 군부로 하여금 당의 핵심 권력까지 틀어쥐게 한 것 등이다.

먼저 김정은의 등장 과정부터 정리해보자. 200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직후 북한 내부 권력구도는 복잡했다. 2004년께부터 김 위원장의 차남 김정철을 후계자로 밀어온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아버지의 병간호를 계기로 권력 핵심에 다가선 김정남과 손을 잡은 장성택의 대립 관계가 2004년에 이어 또다시 재연됐다.

2004년의 후계 논쟁은 혁명정통 승계론과 혁명가계 승계론 간의 사상적·이론적 투쟁의 양상을 띠고 전개됐다. 혁명정통 승계론은 혁명의 정통성만 있다면 반드시 혁명가계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으로 이는 3대 승계를 부정적으로 봐온 장성택 지지자들의 논리다. 이에 반해 혁명가계 승계론은 김일성-김정일에 이은 김씨 가계(즉 백두 혈통)가 혁명을 승계해야 한다는 것으로, 당시 정철의 생모인 고영희와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의 이제강 부부장이 핵심 인물이었다. 이 2004년의 대립 과정에서 장성택이 패해 지방에 철직됐으나 정철을 내심 탐탁지 않게 여겨온 김정일 위원장의 의중에 따라 2005년께부터 후계 논의가 중단된 바 있다(블로그 ‘담담당당의 my korea’ 중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 읽기’).


김정은이 등장한 시점

2008년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정국에서는 김정남과 손을 잡은 장성택이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부활하는 듯했다. 김 위원장이 쓰러진 상태에서 혁명정통 승계론을 명분으로 삼아 장성택에게로 줄을 선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AP Photo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에 북한 주민들이 오열하고 있다.

 

그러나 장성택-김정남 연합구도는 또다시 당중앙위뿐 아니라 김 위원장의 여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의 철저한 반대에 부딪혔다.

김정은이 등장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장성택과 당중앙위의 혈투가 진행되는 이면에서 소장파 군부세력을 등에 업고 김정은이 전면 부상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철저한 배려와 후원에 힘입은 것이다. 김정은은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5년제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교를 다녔다. 북한의 김정은 우상화 문건에 따르면 김정은이 대학 시절 포병 지휘관에 이어 연구원까지 5년 과정을 전 과목 최우등으로 졸업할 만큼 포병전에 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연합뉴스〉 12월19일자). 국내의 한 대북 전문가에 따르면 김정은이 2008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직을 수행했는데, 이때 김 위원장이 군의 신진 실세 그룹인 이영호와 김정각을 불러 충성 선언을 하게 했다고 한다.

2008년 11월 김정일이 뇌졸중 후유증에서 회복되면서 순식간에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정철이 다시 탈락하면서 당중앙위도 다시 뒤로 밀리고 장성택도 일단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정은을 뒤에서 키운 군부가 당중앙위까지 넘어서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장성택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말대로 된 것이다. 그때 이후 군부가 보는 장성택은 딱 ‘후견인 기능’만 해야 한다고 못이 박혀 있는 상태다. 장성택이 막후 실세니, 과두체제니 하는 얘기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장성택에게는 부인인 김경희가 어쩌면 가장 넘기 어려운 벽일 수도 있다. 김경희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이어져온) 조선을 다른 성씨에게 줄 수 없다’는 발언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혁명가계 승계론의 신봉자다. 김정철이 떠오를 때는 남편인 장성택보다 정철을 지지했고, 지금은 김정은의 막강한 후원자다. 장성택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던 것도 김경희였다고 한다. 또 김정은의 별도 집무실과 경호팀이 만들어지고, 한참 전에 김정은 비서실이 가동되게 하는 등 모든 면에서 장성택보다는 김경희의 비중이 크다고 한다.


김정은의 라이벌 장성택의 현주소

세간에는 김정은의 군부 내 결사옹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영호와 당내 지지 세력인 최룡해를 장성택 인맥으로 분류하는 견해가 상당히 유포돼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는 게 북한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의 지적이다. 현재 군부는 70~ 80대인 오극렬·김영춘 등 군의 원로그룹이 한발 뒤로 물러서고 60대 중·후반인 이영호 총참모장, 김정각 총정치국 제1부국장 등이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제1부부장과 김창섭 정치국장, 그리고 김영철 정찰총국장 등과 더불어 최측근 실세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영호가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발탁된 데에는 인맥 측면에서 그가 비주류인 최용건 라인으로 분류됐던 인물이라는 점이 주요 고려 사항이었다고 한다. 그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평양방위사령관 시절 주특기인 땅굴 파기 실력을 발휘해 인정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독자 세력 기반이 없다는 점이 한때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게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김정은에게만 충성하는 인물로 신뢰받게 한 요인이다. 한때 그를 장성택 사람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최룡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룡해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제강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자리를 차지한 인물로 어려서부터 김정일 위원장과 형, 동생 하며 커왔다. 한때 장성택의 오른팔로 여겨졌으나 그 역시 지금은 김정은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동안 많은 이가 김정은 시대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해온 장성택의 현주소는 이처럼 중국의 지원 같은 외생변수 없이 자력으로는 힘을 갖기 어려운 구도다.

군부 내 원로그룹인 오극렬이나 김영춘 등은 무엇보다도 80이 넘은 고령이라는 점에서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이 군부 내 뿌리 깊은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잠재력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로서는 지난해 북한이 매월 평균 100만t, 1억 달러 상당의 석탄을 군부 주도하에 중국에 수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부가 경제적으로 상당히 윤택해짐으로써 불만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즉 원로그룹은 이권을 보장하고 대우를 해주는 선에서 일단은 무마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핵 보유 전제로 한 선군정치 제도화

12월22일자 북한 〈노동신문〉 1면 사설은 김정은을 “혁명 위업의 계승자, 인민의 영도자”라고 부르며 “김정일 동지의 유훈을 지켜 위대한 김정은 동지의 두리(둘레)에 단결해야 한다”라고 했다. 특히 사설은 “우리는 김정은 동지의 선군 영도를 높이 받들고 나라의 자위적 국방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사회주의 제도와 혁명의 성취물을 지켜나가야 한다”라고 밝히는 등 선군이라는 단어를 무려 21회나 사용했다(〈조선일보〉 12월23일자).

즉 김정은 주변에 소장파 군부 실세들을 배치한 김정일 위원장이 두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이들 소장파 군부를 주축으로 선군사상을 주체사상과 버금가는 헌법적 지도이념으로 격상시킨 일이다. 바로 2009년 4월의 헌법 개정이다. 1998년의 헌법 개정 때까지만 해도 헌법에 명시된 북한의 지도적 지침은 주체사상이었다. 그러나 2009년 4월의 개정헌법 3조에 선군사상이 주체사상과 함께 지도적 지침이 되었고, 4조의 주권 조항에서는 새로 군인이 ‘노동자·농민·근로 인테리와 모든 근로인민’과 함께 주권자로 등장했다. 이어 한 달 뒤인 5월 북한은 핵실험을 단행했다. 김정은의 취약한 대외 위상을 핵 보유국과 그를 떠받치는 선군정치로 보강하겠다는 구상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이 같은 구상은 대내외적으로 두 가지 딜레마가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동시에 관계도 개선해야 하는 모순된 목표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이처럼 군부 중심의 선군파에만 의존할 경우 자칫 민생경제의 난맥이 초래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당과 내각 관료들을 축으로 한 민생파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선군파와 민생파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다툼은 사실 지난 2000년 이래 북한 내정의 가장 큰 딜레마였다. 한정된 자원으로 국방력 강화와 민생경제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기 때문에 양측 대립이 언제든 재연될 수 있어서 김정은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지적이다(NK지식인연대 김흥광 대표).

선군사상을 헌법적 지도이념으로 승격한 김정일 위원장은 2010년 9월의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앉힘으로써 당과 군을 아우른 명실상부한 2인자로서 제도적 통치 기반을 마련해줬다. 김정은의 군부 내 서열은 올해 3월 이미 김 위원장 바로 아래인 2위에 이른다. 이로써 자신의 유고 시 권력을 자동 승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또한 당 중앙군사위원회에 이영호 등 핵심 군부 실세를 결집시킴으로써 선군시대를 주도할 수뇌부 구실을 하도록 했다.

마지막 화룡점정이랄까, 아니면 백미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2010년 당 규약에서 김일성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다. 당을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당’에서 ‘김일성의 당’으로 개정하고 ‘김일성이 당과 인민의 영원한 수령’이라고 추가한 것인데, 이는 김정은의 권위가 바로 그 영원한 수령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군 원로를 비롯한 김일성·김정일 시대 인물들의 도전을 차단하기 위한 보호막을 설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영원한 수령을 전면에 부각시킬 경우 자신의 존재는 낮추지 않을 수 없다. 한 대북 전문가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생전의 김정일 위원장은 이미 이런 점까지 치밀하게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미라와 관련된 그의 발언이 상징적이다. 중국에는 마오쩌둥 주석, 베트남에는 호찌민, 러시아에는 스탈린 등 각국에 미라가 하나씩 있고, 다만 레닌의 경우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예외적으로 하나를 더 만든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조선에도 김일성 수령 하나면 된다고 생전의 김 위원장이 말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일성 주석을 내세우고 자신을 낮춘 그의 원모심려를 감안해보면, 앞으로 있을 본인의 장례 일정이나 2·16(김정일 위원장 생일), 4·15(김일성 주석 생일) 등의 정치 일정에 대해서도 아들인 김정은이 편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치밀한 각본을 남겨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은의 과제는 아버지의 음덕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리더십과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자력으로 개척해나가는 일이라 할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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