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금 베네수엘라에서 해외여행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다. ‘미인’ 아니면 독재자 ‘차베스’로 기억되는 나라, 베네수엘라. 하지만 나에게 다가온 베네수엘라의 이미지는 ‘익스트림’(Extreme:극단적)이었다. 자연환경부터가 극단적이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카리브해부터 해발 5000m에 달하는 안데스의 고산지대, 그리고 7m가 넘는 아나콘다가 몸을 뒤척이는 야노스 대평원까지, 도무지 한 나라 안에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공존한다.

하지만 산마루가 높으면 계곡도 깊은 이치일까. 이 나라가 가지고 있는 어두움 또한 극단적으로 깊다. 특히 수도 카라카스는, 잠시만 돌아다녀보면 위에 열거한 모든 아름다움을 싹 잊게 될 정도로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곳이다. 국가에서 제시한 공식 환율은 1달러당 4.3볼리바르(Bolivar:베네수엘라 화폐 단위)이지만, 암달러상들이 바꿔주는 시중 환율은 8~9볼리바르에 달한다. 공식 환전소에서 환전하다간 정부에 사기를 당하는 꼴이다. 

 

ⓒ탁재형 제공메리다 지역의 커피 밭 전경.

 


사람들 또한 여행자에게 우호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치노’(Chino)라는 말이 있다. 원래 뜻은 ‘중국인’이지만 뉘앙스는 ‘황인종 녀석’에 가깝다. 다른 남미 국가에선 면전에 대놓고 그렇게 부르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카라카스의 길거리를 걷다보면 2~3분에 한 번씩은 “에이! 치노!”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친다. 공항에서 여행사 직원과 가격 흥정을 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자 예의 ‘치노’ 어쩌구가 튀어 나오기에 참다 참다 못해 스페인어에서 가장 심한 욕 중 하나로 맞섰다가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누가 우리에게 욕하는 건 알아들어야겠기에, 각종 언어의 욕설은 대체로 구비해(?) 놓는 편이다). 워낙에 인상이 더러운, 아니 강한 우리 카메라맨이 나서서 말리자 저쪽에서 점잖게(?) 물러서기는 했지만.

이런 기억들을 안고 촬영지인 메리다(Merida)에 도착해서 다음 촬영 아이템인 커피 농가를 찾아 안개숲 지대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의 지친 심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안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것도 보통의 위안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종합선물세트 급의 위안이. 그리고 그것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습한 바람이 언제나 안개와 비를 만들어주고, 적도의 특성상 연중 비슷한 기후가 계속되는 베네수엘라는 커피 재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우리가 해발 2000m 산비탈에 자리 잡은 한 커피 농가를 방문했을 때는 마침 수확철이라, 한 무리의 농부가 허리에 노란 바구니를 차고 울긋불긋하게 익은 커피 열매를 따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한동안 그들과 함께 우거진 커피나무 사이를 헤매다가 농가로 돌아왔을 땐 구름 한 장이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며 안개비를 뿌리는 통에 온몸이 젖어 있었다. 안주인 디아나 씨는 짙은 와인 색깔의 커피가 담긴 잔을 우리 일행에게 내놓았다.

 

 

 

 

 

 

ⓒ탁재형 그림안데스 산자락의 커피 열매로 만든 베네수엘라의 커피. 커피 노동자들은 여기에 미체를 타서 마신다.

 

 

“고생들 하셨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몸을 덥히는 데엔 이것만 한 게 없죠.”

감사를 표하며 잔을 받아들고 무심히 입에 흘려넣은 나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손에 든 커피와 디아나 씨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커피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코로 가져가 천천히 냄새를 맡아보자, 갓 볶은 커피 특유의 알싸한 향기 사이로 희미하지만 산뜻하고 매운 기운이 감도는 냄새가 올라온다. 입에 흘려넣자 커피의 쓰고 신 맛이 혀를 타고 넘어갈 때쯤 짜릿하지만 감미로운 뒷맛이 느껴진다.

“커피에 미체(Miche)라는 술을 탄 거예요. 여기선 칼렌타디토(Calentadito)라고 부르지요.”

미체는 이 지역의 커피 농부들이 일반적으로 마시는 술로, 농축된 설탕 덩어리인 파넬라(Panela)로 만든다. 남미의 다른 지역에서 사탕수수의 즙이나 즙을 짜고 남은 당밀 시럽으로 술을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제조법인데, 아마도 사탕수수가 자라기 힘든 고지대 정글이다보니 운반과 보관이 용이한 파넬라를 이용하는 방법이 발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파넬라를 잘게 부수어 물과 섞으면 사탕수수 즙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쳐 1주일간 발효시킨 술을 증류할 때, 아니스(Anis)라는 허브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통과시키는데, 이때 독특한 향기가 추가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체는 그냥 마시기도 하지만, 쌀쌀한 고지대의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커피에 타서 마실 때가 많다고 한다.


최고의 흥분제와 안정제의 만남

 

 

 

 

 

ⓒ탁재형 그림설탕을 농축한 파넬라가 미체의 원료다.

 

커피와 술은 모두 우리에게 잠깐 동안의 ‘위안’을 선사한다. 하지만 커피가 선사하는 위안과 술이 선사하는 그것은 정확히 반대 방향에 위치한다. 커피는 대표적인 흥분제이다. 우리 몸에 활력을 주고 정신이 맑아지게 한다. 그에 비해 술은 안정제라고 할 수 있다. 신진대사를 느려지게 하고 느긋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많은 사람이 술을 흥분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느긋해진 기분 때문에 그동안 억제되어 있던 언행이 가능해지는 것을 두고 오해하는 측면이 크다. 얼핏 생각하면 합쳐서 그 효과가 0이 되어버릴 것 같은 모순적인 두 액체. 하지만 안데스 산자락에서 자란 최고의 흥분제와 정글의 안정제를 한꺼번에 투여받은 나는, 몸에 더운 기운이 돌며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은 느긋해지며 너그러워지는 상태가 되었다. 극단적인 나라에 어울리는 극단적인 위안. 말 그대로 위안의 종합선물세트. 그 순간 카라카스의 번잡스러움쯤은 우주의 티끌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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