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세상이 아닌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고, 우리 편이 아니면 저 편이며, A를 비판하면 B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단출한 논리가 시대의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있다. 이는 양심과 정의, 그리고 상식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가치판단은 실체적 진실과 상황의 결이 모두 고려됐을 때 도출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과정은 쉽지 않고 재미도 없다. 만약 쉽지 않고 재미가 없어서 할 수 없는 가치판단이라면 보류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반MB 전선’ 위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표준 시민에게 가치판단은 지상명령이다. 편은 반드시 갈라져야 한다. 보류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흡사 동일한 질량과 규격의 ‘상식’을 일괄 배급받은 것처럼 SNS에서, 팟캐스트에서, 광장에서 우리 편 저 편 딱지를 붙여댄다.

종합편성채널(종편)에는 애초부터 저 편 딱지가 붙어 있었다. 조선·중앙·동아·매경의 매체 성향과 그간 한국 사회에서 기능해온 방식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순서이다. 더구나 ‘미디어법 개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출발 과정상의 잡음은 향후 이 채널들이 누구의 이익에 종사할 것인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종편 채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가치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앞서 언급한 표준 시민들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저 편’ 딱지를 끊었다. 꽤 조심스럽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들까지 같은 판단을 내렸다.

이 방면에서 과거 ‘안티조선 운동’은 꽤 명확한 합의점을 만들어낸 바 있다. 극우 매체에 참여하는 행동 자체가 결국 그 매체의 진보적 장식 기능을 할 것이며, 그것이 극우 매체의 문화적 기동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거의 합의가 지금 종편 출연자에게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의문은 미처 제기되지 않았다. 개국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나. 사례를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거다. 그러나 종편에 출연하는 특정인을 부역자로 쉽게 낙인찍은 행위에 대해서는 좀 더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 대체 거기 어떤 근거가 있는가. 


내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SBS에 영화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외주 제작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 외주 제작사는 동아 종편 채널에 납품할 영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었다. 나는 방송에 정치적 맥락의 검열이 이루어지는 경우 언제든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확실히 전달했다.

생계형 저술 노동자가 정치와 무관한 외주 제작 프로그램에 자유로운 발언을 전제하고 출연하는 문제를 ‘부역’ 혹은 ‘변절’로 규정지을 정도의 강도 높은 기준은 합의된 적이 없다. 출연하는 것만으로 극우 매체의 문화적 기동 방식에 종속되는 것이라는 과거의 합의 내용은, 지금과 같이 대부분 외주 제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동시에 채널 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방송 환경에서 기계적으로 적용될 근거를 잃어버린다. 


뻔뻔스러운 부역자로 남거나, 종편에서 하차하거나

순서가 거꾸로 되었다. 종편 출범 과정에서의 문제점과 향후 발생 가능한 해악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종편에 출연하는 개인의 노동이 왜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 관해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합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놓고 종편에 출연한 개인을 상식과 양심을 들어 부역자와 변절자로 낙인찍었다.

더불어 그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동이 왜 나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해 해명하게끔 만들었다. 이것은 분열적인 요구다. 종편에 출연한 개인은 자신의 선의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영혼을 팔아넘긴 뻔뻔스러운 부역자로 남거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반성하거나. 우리 편이 아니면 저 편일 수밖에 없는 좁고 편협하며 단출한 세상, 그 경계에 종편 부역자들이 있다.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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