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제공에이즈 감염인도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위는 에이즈 치료 보장을 위한 집회 모습.
지금 서울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천막도 없이 맨바닥에 침낭만 덮은 채 노숙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화에 반대하는 인권활동가이다. 윤 가브리엘 씨(40)는 이들을 지지 방문하기 위해 힘겹게 명동 언덕을 오른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과 함께 노숙 투쟁을 하고 싶지만 그의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시력도 약해지고 걷는 것도 편하지 않은 ‘에이즈 감염인’이다.

지난해 담당 의사는 그에게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다른 감염인과 달리 국내에 나온 치료약 모두에 다 내성이 생겨 백약이 무효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의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Roche)에서 나온 푸제온(Fuzeon)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로슈는 한국 정부가 제시한 가격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푸제온을 한국에 공급하기를 거부했다.

가브리엘 씨는 다국적기업의 기자회견장에서 “나는 지금 당장 로슈 사가 생산하는 푸제온이라는 약을 써야 하는 환자다. 왜 푸제온의 약값이 비싸야 하는지 대답하라”고 절규했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한국 정부 역시, 2003년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강제 실시하라는 환자의 절규를 외면했을 때처럼 푸제온을 한국에 들여오기 위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친구들이 나섰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미국의 에이드포에이즈(Aid for AIDS)라는 구호단체와 연락이 닿았다. 그들은 가브리엘 씨의 사연을 듣고 푸제온을 제공해주기로 약속했다. 조건은 그의 진료를 담당한 의사와의 원활한 소통이었다.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이 가브리엘 씨에게 부작용이 없는지 세밀히 협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였다.

그러나 한국의 의사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다. 에이드포에이즈는 결국  푸제온 제공에 난색을 표했다. 이미 한쪽 눈을 실명하고, 남은 눈마저 점차 희미해져가는 상황이었다. 가브리엘 씨 친구들은 에이드포에이즈 측에 한국 의료기관과 의사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제야 에이드포에이즈는 ‘한국의 특수상황’을 인정하고 푸제온을 한국으로 보내주었다.

이것은 가브리엘 씨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5000여 명에 달하는 에이즈 감염인의 이야기이고,  글리벡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백혈병 환우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가족 중 누군가의 병 치료를 위해 평생에 한 번은 약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할지도 모를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가와 의료인이 에이즈 감염인 치료 방치

가브리엘 씨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이야기에는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운 초국적 제약회사와 권위적인 한국의 의료체계, 국민 생명을 외면하는 국가, 그리고 이 문제를 인권이 아닌 도덕의 문제로 백안시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이 담겨 있다.

직장 건강검진에서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되면 그 즉시 고용주에게 알려져 해고당한다. 이들을 시한폭탄 취급하는 국가는 모든 정보를 관리하고 감시한다. 하지만 보건소 직원의 부주의로 인해 이웃에게 알려져 동네에서 쫓겨나는 일이 벌어져도 국가는 모른 척한다. 에이즈가 그렇게 쉽게 옮겨지지 않는 병이라는 것을 아는 의사조차 감염 환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도 감염인은 사회 편견이 두려워 한마디도 못하고 지하에 숨어 쥐죽은 듯 살아간다. 가브리엘 씨의 말처럼 이들은 ‘에이즈 때문이 아니라 사회 차별과 비싼 약값 때문에’ 죽어간다.

“국가인원위원회는 감염인의 인권 현실에 대한 실태도 조사하고 강제적 직장검진이나 실명등록제를 반대하면서 에이즈 예방법을 개정하라는 권고안을 내는 등 그래도 국가기관 중에서 가장 적극적인 조처를 취해온 곳입니다. 이런 인권위가 독립성을 상실한다면 저 같은 감염인은 누구에게 호소해야 합니까?” 이것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윤 가브리엘 씨가 다시 칼바람을 맞으며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화에 반대하는 까닭이다.

기자명 엄기호 (‘팍스로마나’ 가톨릭지식인문화운동 동아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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