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에 세계를 위협한 것은 군비 경쟁이었다. 각 나라들은 (잠재적) 적국에 대응하기 위해 군비를 올렸는데, 이런 행태를 모든 나라가 되풀이하다 보니 세계는 점점 더 위험해졌다. ‘포스트 냉전’ 시대에는 ‘교역 자유화’와 ‘투자자 보호’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에 즈음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 뛰어든 일본을 보면 그렇다. 처지를 바꿔 일본·미국 FTA가 먼저 비준되었다면 한국 정부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이런 ‘게임의 법칙’을 설계한 것은 미국이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8월11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의 FTA 비준 직후 TPP 협상에 참여할 것이 확실하다. 이는 일본을 TPP로 들어오게 자극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11월22일 한·미 FTA 비준동의안이 통과된 이후 야권의 대안은 한·미 FTA ‘폐기’ 혹은 ‘무효화’로 모이는 분위기다. 한·미 FTA가 공공정책 파괴로 국가 주권까지 무력화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대응이다. 사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나’의 ‘합리적’ 행위가 반드시 합리적 결과로 직결되지는 않는 법. 예컨대 사과 시세가 비쌀 때 개별 농가의 합리적 행위는 사과 생산을 늘리는 것이지만, 모든 농가가 이런 행태를 보이면 사과값 폭락으로 모두가 손해를 보는 ‘비합리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후 한·미 FTA에 합리적인 대응 전략을 세우려면, 다음과 같은 주변국 행태 및 사태 추이를 철저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AP Photo오바마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1월12일 APEC 회담에서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와 함께 서 있다.

 


FTA 다음에는 TPP 온다: 미국은 현재 환태평양 9개국과 더불어 TPP를 추진 중이다.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야권이 내년에 집권해서 한·미 FTA를 폐기하더라도 다시 TPP 참여를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미국은 TPP 협상에서 한·미 FTA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자유화 및 투자자 보호’를 제안하고 있다. 한국과의 FTA에만 적용한 높은 수준의 지적재산권 보호(의약품 허가-특허 연계 등), 지금까지는 듣도 보도 못한 ‘공기업에 대한 비관세 장벽 간주’ 등 새로운 조항이 그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은 TPP에 중국을 뺀 채 가능하다면 많은 나라를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TPP의 목적 자체가 환태평양 지역을 기반으로 새로운 글로벌 교역·서비스·투자 스탠더드를 만들고 이를 통해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의도가 성공한다면, 수출 의존도가 세계 최상위급인 한국은 한·미 FTA보다 더 가혹한 조건을 무릅쓰더라도 TPP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늑대 피하다 호랑이 만나는 격. 심지어 이 경우에는 한·미 FTA 폐기로 인해 TPP에서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더욱 강력해질 수 있는 ISD: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는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확실한 취지 말고는 그 쓰임새가 매우 불확실한 제도다. ISD에 대한 국내 FTA 찬반 양 진영의 해석이 극도로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통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집계된 ISD 분쟁은 모두 392건. 그나마 이 가운데 195건은 아직 계류 중이다. ISD 재판을 주관하는 국제투자분쟁해결기구(ICSID)가 1966년에 설립되었는데도 그렇다. 판례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건강보험제도가 ISD 대상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쟁만 벌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어쩌면 미국의 어떤 의료보험회사가 한국 정부를 실제로 제소하는 상황이 벌어져야 결론지어질 것이다. 그 보험사가 ‘건강 부문은 FTA에서 유보한다’라는, ISD와 상반되는 조항 사이에서 어떤 허점을 찾아 법리를 개발했는지도 그때 가서야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ISD에 대한 미국 정부의 견해가 어떤지를 살펴보는 것이 사태를 가늠하는 데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5년 내로 수출 실적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최근 공언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고부가가치 서비스(의료, 금융 등) 수출을 대폭 늘리려 할 것이고, 이는 ISD 조항의 적극적 활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미국이 한·미 FTA와 TPP에 걸고 있는 국익 중 하나는 새로운 교역 스탠더드의 확립이다. 그 수단 중 하나는 ‘새로운’ ISD일 것이다. 비교적 얌전했던 ISD가 ‘강하고 거친’ ISD로 탈바꿈해 이와 관련된 판례를 한국과 환태평양 국가들에서 축적해가는 사태가 닥칠 수도 있다.

TPP의 기본 모순: 그러나 한·미 FTA에서 TPP로 가는 미국의 전략에는 상충되는 목표가 담겨 있다. 미국은 TPP의 테두리에 가급적 많은 국가를 포섭해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 합의된 조항들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만들어 중국을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제안하는 TPP 스탠더드는 많은 국가를 끌어들이기엔 수준이 너무 높다. 즉, 미국 전략의 양대 목표가 ‘상호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협상국 중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ISD 및 엄격한 지적재산권 조항에 부정적이다. 아세안(ASEAN) 개도국들 역시 공공 부문의 비중이 큰 편으로 미국이 선호하는 서비스·투자 조항을 쾌히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AP PhotoTPP는 궁극적으로 중국을 겨냥한다. 사진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브레턴우즈 협상을 주도하며 세계경제의 틀을 짤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가 당시만 해도 ‘관대한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브레턴우즈 체제는 각 나라의 다양한 경제발전 단계를 고려한 비교적 너그러운 무역 질서였다. 더욱이 당시의 미국은 유럽의 복구를 위해 현재로 따지면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유럽에 퍼부은 덕분에 세계 패권국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FTA와 TPP는 마치 야수처럼 자국 이익 챙기기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런 미국이 과연 ‘21세기형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드는 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일본과 중국: 일본은 미국의 TPP 프로젝트에서 핵심 국가다. 그러나 일본 역시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TPP를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예컨대 미국은 일본의 TPP 참여 선결조건으로 사실상 우정국 민영화 재추진을 내걸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우정국에 축적된 시민들의 저축 및 보험금 300조 엔을 빌려 공공정책 재원으로 사용해왔다. 우정국 민영화란, 정부가 더 이상 우정국 자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공공정책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지금보다 훨씬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야 하는데,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인 일본 정부의 부채 부담을 늘리고 재정건전성도 악화시킬 것이다. 이 밖에도 TPP는 농업과 소자영업 등 서민경제 부문에는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리라 예상된다. 일본 정부는 일종의 쇼크 요법으로 TPP 참여를 결정했다지만, 쇼크 좋아하다가 ‘쇼크사’ 당하는 결과가 빚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미국의 TPP 압박에 중국이 굴복할지도 미지수다. 미국이 바라는 대로 자본시장을 자유화하고 개방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중국 경제의 전권을 쥔 공산당 내 ‘붉은 자본가’들이다. 이들이 기득권 때문에 굴복이 아닌, 다른 방식을 선택할 때 한국의 운신은 매우 불투명해질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 가능성: 유럽연합(EU)발 세계 경제위기의 가능성이 점점 더 현실화하고 있는 것도 주요 변수다. 만약 세계 경제위기가 재발하면 FTA와 TPP의 이념적 틀인 경제적 자유주의는 큰 타격을 피할 수 없고, 이에 따라 TPP 협상은 미궁을 헤매게 될 것이다. 보호주의 창궐로 ‘자유화’가 기피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의 딜레마: 통상국가인 한국은 무역 부문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감당해서는 안 되는 나라다. 복지 문제가 한국 사회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면서 공공정책에도 근본 개혁이 필요한 나라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동시에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급속히 깊어지고 있다. 2012년 권력 재편기 이후 차기 정부가 넘어야 하는 벽들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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