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목요일 오후 1시30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앞. CBS·불교방송·원음방송·평화방송 관계자들이 모였다. 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에서 주최한 ‘미디어렙’ 토론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잠시 후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 종교방송사 대표는 “종교방송 4사 대표가 모일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라”라고 지시했다. 다른 종교방송사 관계자가 받은 전화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날 오전 SBS 측이 광고대행사 대표들을 초청해 조찬을 가지면서 ‘내년 1월부터 자사 미디어렙을 통해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바로 연락해온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다른 종교방송사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SBS가 자사 렙으로 직접 영업을 시작하면 MBC도 따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역방송사와 종교방송은 다 죽는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 먼저 일반인에게는 낯선 미디어렙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은 방송사를 대신해 기업에 광고 시간을 팔고 수수료를 받는다. 방송사가 신문사처럼 직접 영업을 할 경우 공영성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보도·제작과 광고를 분리’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1981년부터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코바코)를 설립해 지상파 방송의 모든 방송광고를 의무적으로 위탁하도록 했다. 또 코바코는 연계 판매를 통해 방송광고 재원을 광고 취약 매체인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에 분배해왔다. 지상파 3사를 중심으로 팀을 나누고, 각 팀에 중소 방송사를 매칭시켜 방송광고를 연계해 판매해온 것이다.


ⓒ뉴시스1월20일 ‘한국방송광고공사 창사 3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내빈들이 기념떡을 자르고 있다.

코바코는 군사독재 정권이 방송 장악 수단으로 도입한 측면이 있다. 광고주들로부터는 ‘연계 판매로 기업의 선택권을 침해하고 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 기능을 해왔다는 평가도 받는다. 조준상 공공미디어연구소장은 코바코 체제의 순기능을 평가했다. 방송사와 광고주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결탁을 차단했고, 방송광고 요금 인상을 억제해 물가 수준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점 등이 그것이다.


종편 특혜 위해 법안 미룬다는 의혹도

조 소장에 따르면, 코바코는 광고 연계 판매를 통해 지역방송·종교방송 등을 지원함으로써 미디어 생태계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도 기여했다(연계 판매가 전체 지상파 방송광고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1%로 2010년 기준 2400여 억원). 또 코바코가 조성한 공익자금은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을 건립하고 수많은 예술단체를 진흥하는 데 활용되었다. EBS와 아리랑TV를 지원하고, 공익 프로그램 제작을 돕는 데도 쓰였다.

그런데 2008년 11월 헌법재판소가 코바코의 지상파 광고 독점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리면서 상황이 묘해졌다. 당시 방송광고 영업을 하려던 한 회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하자, 헌재는 코바코 독점 체제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판결 취지에는 “코바코가 방송의 공공성을 담보하고 종교방송과 지역방송에 안정적 운영 재원을 지원한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김민기 숭실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 같은 헌재 판결 이후 미디어렙 법안이 마련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만 3년이 되도록 미디어렙 법안 도입은 지연되었다(그간 MBC와 SBS는 방통위 권고로 코바코 대행 체제를 유지해왔다). 정당·방송사·신문사 등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영묵 교수(성공회대·신문방송학)는 판결 이후 미디어렙 논란을 3라운드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코바코 독점 체제를 해소하는 게 문제였다. 공영과 민영으로 가를 때 MBC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논점이었다. 최 교수는 “MBC는 기존 코바코보다는 민영 미디어렙으로 들어가고 싶어했다”라고 말했다. 기존 코바코의 판매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경우 더 나은 광고 실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영 미디어렙과 민영 미디어렙 가운데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서울 MBC)’는 요구로 표현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중앙·동아·매경(조중동매)’ 종합편성채널(종편)이 허가되면서 미디어렙 논란은 2라운드로 접어들게 되었다. 종편의 직접 광고 영업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논란이 옮아간 것이다. 일반 PP(방송채널 사용사업자)는 직접 광고 영업을 하는 것이 허용된다. 종편은 외형상 자신들이 PP이므로 직접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당과 언론·시민단체의 생각은 다르다. 종편은 PP이지만 전 국민의 85%가 가입되어 있는 유료 방송이 의무적으로 전송하는 ‘특혜’를 누리는 데다 지상파와 똑같은 편성을 하기 때문에 ‘조중동매’ 종편의 광고 영업이 의무적으로 미디어렙에 위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일반 PP처럼 종편에 직접 광고 영업을 허용하자는 방침이었다. 이 부분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법안 처리가 미루어졌다. 이런 ‘무방비 상태’가 계속되자 일각에서는 종편들이 직접 광고 영업에 돌입하는 데 제약이 없도록 하기 위해 여당이 법안 처리를 유야무야 미루는 게 아닌가 하는 비판이 일었다.

이러던 차에 지난 10월27일 SBS 지주회사인 SBS미디어홀딩스가 이사회를 열어 미디어크리에이트(자본금 150여 억원 규모)를 자회사로 편입해 방송광고 판매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로써 미디어렙 논란은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SBS 측은 ‘종편 채널이 등장하고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국회 입법을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MBC가 독자 미디어렙 설립에 나섰다. ‘종편과 SBS가 나선 이상, 서울 MBC도 자사 렙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MBC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난 상태다. 김재철 MBC 사장은 11월7일 임원회의에서 ‘미디어렙 설립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럼에도 MBC는 언제든지 자사 미디어렙 설립에 나설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최영묵 교수는 “지상파들이 자사 렙을 설치해 광고 영업을 하겠다고 나서면 종편의 독자 영업을 막을 논리가 없어진다. SBS가 논점을 흐리며 나선 것이다”라고 말했다.

11월10일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열린 ‘미디어렙 관련 토론회’에서는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발제를 맡은 김민기 교수는 종편의 등장과 미디어렙 경쟁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 신문이 광고를 내면 모든 신문에 광고를 내는 원턴(One-Turn) 현상이 방송광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광고주가 돈을 내지 않아도 광고가 나오는, 일본말로 ‘뎃뽀(鐵砲)’ 광고 또한 방송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결국 경쟁이 과열되면서 기업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광고 영업이 나오지 않을까 매우 우려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먼저 치명타를 입게 되는 곳이 그동안 지상파 프로그램과 연계 판매 방식으로 광고 수익을 배정받아온 종교방송과 지역방송사들이다. 한 종교방송사 경영 관계자는 “우리 회사는 방송광고료가 35%, 협찬 광고료 등이 25%를 차지한다”라고 말했다. 전체 매출액의 60%를 광고와 협찬에 의존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런데 만일 연계 판매가 안 되는 상황이 온다면 방송광고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아가 12월에 출범하는 종편들이 기업 협찬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기 때문에 협찬 광고료도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해 안에 미디어렙 법을 만들어 연계 판매를 강제하지 않으면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광고 영업을 할 수도 없다. “직접 영업을 하는 게 만만치 않다. 광고대행사가 100개는 되는데, 그럴 인력이 없다. 협찬을 받으려면 대행사와 별개로 기업 홍보실을 다녀야 한다. 비용이 엄청나게 들게 된다.”


ⓒ뉴시스8월25일 전국언론노조 조합원들이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미디어렙 입법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역 민방도 타격이 예상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9개 지역 민방의 노조 지부장들이 상경해 목동 SBS 사옥 앞에서 삭발 투쟁을 벌인 바 있다. 김대환 언론노조 지역민방노조협의회 의장(강원민방 지부장)은 “지역 민방 매출의 40%가 연계 판매다. 자체 광고 판매가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SBS 측이 ‘지역 민방에 최근 3년치 평균 광고 배분율을 5년 동안 보장하겠다’고 얘기했다지만, 여기에는 ‘광고시장에 급격한 환경 변화가 없는 한’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결국 연계 판매를 언제까지 할지는 SBS 뜻에 달렸다는 얘기다.


“종편 광고는 케이블TV에서 빠져나갈 것”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지역방송의 광고 수입은 자체 광고 판매, 연계 판매, 전파료 수입 등으로 구분된다. 전파료 수입은 중앙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지역사들이 릴레이 송출함으로써 시청자가 늘어나고 광고 수익도 늘어나는 대가로 프로그램 광고 수익을 배분하는 것이다. “이 전파료는 SBS 프로그램 광고료에 비례해 내려오기 때문에 SBS 계열 PP 광고가 늘고 SBS 광고가 줄어든다면 전파료까지 줄어들 수 있다. 또 전파료 배분 비율 자체도 홀딩스 렙이 줄일 수 있다. 결국 지역 민방으로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조준상 소장은 “종편을 빌미로 지상파 두 회사가 또 다른 야욕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SBS와 MBC의 경우 종편이 등장하면서 광고시장에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를 대지만 그 근거도 약하다고 지적했다. 박원기 코바코 연구위원은 최근 종편 PP 및 보도 전문 PP가 시장에 진입할 때 일어날 파급 효과를 측정한 보고서를 펴냈다. 광고매체 예산을 배분하는 기업 담당자 200여 명 등을 상대로 설문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종편 등장이 광고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추산한 결과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2~2015년 종편 PP 및 보도 전문 PP로 광고가 이동하는 비율은 케이블TV가 연평균 14.1%, 위성방송·DMB 등 기타 부문이 13.2%였다. 곧 이들 부문에서 광고비가 가장 많이 빠져나간다고 분석된 것이다. 그 다음 옥외 광고(9.1%), 인터넷(7.0%), 지상파TV(5.6%), 라디오(3.7%), 신문 광고(2.0%) 순서였다. 요컨대 매체력이 약하고 광고를 옮겼을 때 부담이 적은 ‘만만한 매체’에서 광고를 줄여 종편 쪽으로 돌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민주당 전병헌 의원은 ‘한나라당과 6인 소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현실적으로 11월 안에 매듭을 짓지 않으면 어렵다는 판단이다. 연말 예산안을 두고 여야가 격돌할 가능성이 크고, 내년 2월에 임시국회를 연다고 하더라도 총선 직전이어서 ‘별무소용 회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총선 이후 19대 국회가 구성돼 상임위가 구성되면 바로 대선 국면으로 넘어가 미디어렙을 논의할 여유가 없기도 하다.

현재 민주당 당론은 ‘1공영-1민영-종편 유예 불가’로, 한나라당 당론은 ‘1공영-1민영-종편 3년 유예 뒤 재검토’로 정해져 있다. 여야 모두 ‘1공영-1민영’에 동의한다. 반면 종편과 관련해서는 ‘유예 불가’와 ‘3년 유예 뒤 재검토’가 맞서며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최근 한나라당이 이전에 민주당이 비공식 제안한 ‘종편 승인일로부터 3년 유예’에 동의했다는 말도 나온다.

거대 방송사나 종편이 직접 광고 영업을 하게 되면 그 피해는 종교 방송이나 지역방송만 입는 것이 아니다. 방송의 공공성과 다양성이 무너진 데 따른 최대 피해자는 시청자가 될 수밖에 없다. 자사 렙을 만들겠다는 거대 방송사의 웅직임에 시민사회가 극력 반발하고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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