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점령대의 시위는 지금껏 별다른 사고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10월 하순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시에서 벌어진 시위는 예외였다. 당시 시청에 진입하려는 시위대 수백 명을 상대로 경찰이 최루탄을 쏘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라크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한 시위대원이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참전 군인들까지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1월15일에는 뉴욕 주코티 공원에 모여 있는 월가 점령대를 경찰이 해산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 시위대 15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현재 미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월가 점령대의 시위는 주요 뉴스로 보도된다. 또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을 통해서도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정치운동가인 놈 촘스키와 영화감독 겸 제작자 마이클 무어, 영화배우 알렉 볼드윈을 비롯한 명사들도 시위 현장을 방문해 격려를 보냈다. 일부 피자 가게가 ‘오큐파이(OccuPie)’ 피자를 개발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비디오 게임업자들이 관련 상품을 개발 중일 정도로 이 운동은 근래 보기 드문 ‘전국적 현상’으로 떠올랐다. 최상위 1%의 탐욕과 부패를 나머지 99%가 응징한다는 목표 아래 겨우 7주 전에 시작된 월가 점령대의 시위가 ‘티파티(Tea Party)’에 버금가는 사회변혁 운동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월가 점령대의 시위가 이처럼 단시간에 크게 주목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이 내세우는 핵심 구호인 경제 불평등이 대다수 미국인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다수 미국인은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어도 단순히 누가 부자라는 이유로 그를 싫어하진 않는다. 자기도 언젠가는 부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정부가 공정하게 제공해주느냐인데,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상위 10%가 미국 재산 73% 차지하는 현실
이들은 그 단적인 예를 2008년 금융위기가 불거진 뒤 드러난 월가 금융회사들의 탐욕과 부패, 그리고 정부의 무능에서 찾는다. 당시 월가의 금융 자본은 자기들이 고객에게 파는 채권이 정크(junk), 즉 부실 채권임을 알고도 시장에 내놓아 수백억 달러를 챙겼다. 결국 그로 인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발생해 금융위기가 초래됐고,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수천억 달러를 퍼부어 이들을 구제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위기를 초래한 금융기관들은 살아남았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빈곤층과 중산층에 돌아간 것이다.
실제로 2007~2009년 월가 금융 자본의 이윤은 720% 증가한 반면 일반 미국인의 집값은 35%나 폭락했다. 또 지난 2007년 조사에 따르면 최상위 1%가 미국 전체 재산의 34.6%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다시 최상위 10%로 확대하면 미국 전체 재산의 73%에 달한다. 이런 사실이 월가 점령대를 분노케 만든 것이다. 월가 점령대가 지목한 1%는 주로 은행과 주택담보대출 회사, 보험회사 등이다.
내년 11월 대통령 선거와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뉴욕 타임스〉와 CBS 방송이 최근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경제 불안감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미국인 사이에 팽배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를 불신한다는 답변이 89%, 의회를 불신한다는 대답이 84%, 나라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대답이 74%에 달했다. 또 응답자 대다수는 소득이 불평등하고 중산층이 소외됐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으며, 3분의 2는 부의 공정한 재분배가 필요하다고도 대답했다.
월가 점령대가 이처럼 사회적으로 주목되면서 거둔 성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정치권의 관심을 끌어냈다는 점이다. 다른 누구보다 오바마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였다. 뉴욕에서 시작된 월가 점령대는 10월 초 수도 워싱턴 D.C.에도 진출해 백악관과 지척에 있는 맥퍼슨 광장에 진을 치고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D.C.를 점령하라’는 이름의 이 시위대는 중산층의 대변자임을 자처해온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경제 불평등을 호소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전임 공화당 부시 행정부로부터 경제위기를 넘겨받은 오바마 대통령도 월가 점령대가 내세운 경제 불평등 문제와 부자에게 유리하도록 돼 있는 기존 세제 문제에 관해 개혁 의지가 확고하다. 그런 만큼 오바마는 “요즘 제대로 살려는 사람들은 응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보상을 받고 있다”라면서 월가 점령대의 시위에 공감을 표시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참모진은 경제 불평등 문제가 향후 선거에서 핵심 이슈가 되리라 보고 월가 점령대의 시위가 터지기 이전부터 면밀한 대책을 마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공화당, 시위대에 엇갈린 반응
내년 11월 대선과 의회 중간선거에서 경제 문제가 최대 이슈로 등장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진보적인 월가 점령대의 풀뿌리 운동이 선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월가 점령대가 아직은 초보적 풀뿌리 운동단체일 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우파 풀뿌리 조직인 티파티에 맞먹는 정치 조직으로 성장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진보 성향의 유권자를 끌어 모으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전통적으로 친민주계인 노조가 월가 점령대 시위에 합세하기로 한 사실에도 민주당은 크게 고무된 기색이다. 물론 현 단계에서 월가 점령대가 민주당과 손잡을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월가 점령대의 조직원인 케빈 지스 씨는 최근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우리는 오바마의 정책에 불만이 많다. 오바마는 현실감이 없으며, 현재 자신의 재선을 위해 10억 달러를 모금하러 전국을 누비기 바쁘다”라고 꼬집었다.
민주당과 달리 전통적으로 친월가, 친기업 쪽인 공화당은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에릭 캔터 하원 원내총무는 월가 점령대를 가리켜 미국인끼리 서로 대립시키려는 ‘폭도’라고 발언했다. 그런가 하면 요즘 잘나가는 공화당 대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인 허먼 케인은 월가 점령대의 시위를 “반자본주의자들의 공작이다. 일자리가 없고 부자가 아니면 스스로를 탓해야지 왜 월가를 비난하고, 대형 은행을 비난하는가”라고 비판했다. 카네기 멜론 대학의 카이론 스키너 교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인터뷰에서 “월가 점령대의 운동은 지금까지 티파티가 차지해온 이슈에 대해 나름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치인에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앞으로 월가 점령대와 티파티, 두 조직의 상이한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정치인에게 주어진 도전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월가 점령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 또한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근래 부쩍 많이 제기되는 문제는 전국 규모로 확산되는 시위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조직할 중앙 지도부가 없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성난 군중을 끌어 모으기는 쉽지만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지 않을 경우 월가 점령대는 지금처럼 불만과 성토 일변도의 시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옥외 집회가 계속될 경우 곧 닥칠 겨울철에 시위 자체가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 또 월가 점령대가 이런저런 불만과 성토의 소리를 끊임없이 쏟아냈지만 지도자가 없다보니 이를 세련된 정책 대안으로 가다듬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총회에서 90% 찬성해야 요구 사항 결정
하지만 이런 외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월가 점령대는 구태여 지도부를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월가 점령대는 스스로를 ‘지도자 없는(leaderless)’ 조직이라고 명확히 규정한 데다, 자신들은 최상위 1%에 맞서는 99%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군림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나마 지도부에 해당하는 조직이 있다면 월가 점령대의 요구를 최종 결정하는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을 뿐이다. 총회는 월가 점령대의 본부인 뉴욕 주코티 공원에서 매일 저녁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데, 어떤 안건이든 단순 과반수가 아닌 90%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결된다. 사실상 만장일치가 아니면 통과가 어렵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의사결정에 대해 긍정 평가도 있다. 미국 포드햄 대학 사회학과 헤더 고트니 교수는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월가 점령대의 운동은 참여 민주주의의 실험실’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월가 점령대의 운동은 국민이 더 이상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으며, 스스로 더 잘할 수 있고 모두가 지도자라는 점을 일깨워준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도 최근 호에서 월가 점령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 이 같은 ‘참여 민주주의’를 꼽았다.
일부에서는 지금처럼 지도부가 없는 월가 점령대가 앞으로 얼마나 더 시위를 지속할 수 있겠느냐 하는 회의론도 강하다. 하지만 막상 앞장서 시위를 이끄는 조직원들 사이에는 ‘운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기류가 팽배하다. 이들의 낙관대로라면 내년 11월 선거 때까지 월가 시위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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