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주둔지의 물건을 잘 쓰지 않는다. 웬만한 것은 미국에서 다 가져온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채소류도 냉동하여 가져오는 정도이다. 이 물건은 주둔지 밖으로 빠져나오기 마련이고, 그 물건들로 인해 주둔지의 생활이 미국화하기도 한다. 콜라·커피·피자·초콜릿·햄·소시지·치즈 등이 한국의 일상 음식으로 재빨리 자리 잡은 것도 미군 덕(?)이 크다.
한국전쟁은 온 국민을 빈민으로 전락시켰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군 부대에서 좋은 물건이 빠져나와도 이를 살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이 쓰다 버린 것을 가져다 귀하게 썼다. 거지도 미제 깡통을 들면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몰래 나오는 먹을거리도 그들이 먹다 버린 것이었다. 잔반, 즉 음식물 쓰레기였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었다. 고기 덩어리도 있고 햄·소시지 등도 있었을 것이다. 케첩에 버무려진 샐러드도 있었을 것이고, 빵 조각도 있었을 것이다. 담배꽁초도 있었을 것이고, 휴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솥에 넣고 끓여서 먹었다. 사람이 먹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음식의 이름은 ‘꿀꿀이죽’이었다. 그래도 잘 팔렸다. 그때는 너나없이 가난했고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이 꿀꿀이죽은 1960년대 말까지도 팔렸던 것으로 보인다.
꿀꿀이죽 묘사한 1964년 〈경향신문〉 기사
부대찌개는 미군 부대의 잔반을 가져와 끓였던 꿀꿀이죽에서 비롯했다고 흔히 말한다. 과연 그럴까? 언어란 묘하여, 그 언어가 이르는 실체가 장기간 보이지 않게 되면 머릿속에 그 실체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젊은 세대에게 꿀꿀이죽을 설명하면 요즘 흔히 먹는 부대찌개 정도의 음식이겠거니 여기게 된다. 나도 꿀꿀이죽을 먹어보지는 못했다.
조금 리얼하게 꿀꿀이죽을 묘사한 글이 있다. 1964년 〈경향신문〉 1면 왼쪽 톱 기사이다. 기사 제목은 ‘허기진 군상’이며, 드럼통에 담긴 꿀꿀이죽을 사가는 사람들의 사진이 크게 실려 있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먹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먹는 것이 죄라면 삶은 천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돼지 먹이로 사람이 연명을 한다면 식욕의 본능을 욕하기에 앞서 삶을 저주해야 옳단 말인가?” 그러면서 30원어치이면 여덟 식구가 먹을 수 있다는, 꿀꿀이죽을 사가는 한 여인네의 인터뷰가 붙어 있다. “쌀 30원어치로 죽을 끓여 여덟 식구가 풀칠하면 점심때 식은땀이 쏟아진다.” 기사는 이어진다. “담배꽁초, 휴지(무엇에 썼는지도 모름) 등 별의별 물건이 마구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 반액체를 갈구해야만 하는 이 대열! 그들은 돼지의 피가 섞여서가 아니다. 우리의 핏줄이요 가난한 이웃일 따름이다….”
그러면 지금의 부대찌개는 언제, 또 어찌 만들어졌을까. 미군 기지가 가까운 지역, 또 미군 부대 물건이 유통되는 시장 근처의 식당에서 처음 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용산, 남대문시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의정부 부대찌개가 유명한데, 여느 향토 음식처럼 한 식당의 명성이 한 지역으로 확장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대찌개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이 음식이 자신이 창안한 음식이라는 관념이 있었을까. 부대찌개의 조리법을 보면 대부분 김치가 들어가는데, 돼지고기 대신 햄과 소시지를 넣은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재료를 넣고 끓이는 우리의 찌개 문화에 이 햄과 소시지 정도는 별스러운 재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니, 애초에 이 햄과 소시지가 들어간 찌개의 이름은 김치찌개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김치 없으면 부대찌개 맛 많이 비어
1980년대 중반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그러니까 미군 부대의 것과 맛이 같은 햄·소시지가 국내 기업에서도 생산되었다. 이 햄과 소시지는 찌개를 끓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경제 사정은 아주 좋았다. 덩달아 외식 산업이 급팽창했다. 그중에 부대찌개도 툭 불거졌다. 스토리가 좋았다. 한국전쟁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음식, 미군 부대에서 그 재료를 가져왔을 것이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음식명, 그리고 1966년 방한한 미국 대통령 존슨의 이름을 따 한때 ‘존슨탕’이라 불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풍문까지 붙었다. 1990년대에 들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부대찌개를 탐닉했다. 이제 햄과 소시지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름이 부대찌개이기만 하면 미군 부대를 바로 떠올리게 되고, 한때 가난했던 그 시절을 ‘추억’까지 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 음식에 한국인의 영혼이라도 담겨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부대찌개에 햄·치즈·통조림 콩 등등 서양의 음식 재료가 들었다 하지만 그 맛을 보면 김치찌개의 일종이다. 이태원 등에 김치를 넣지 않은 부대찌개가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별종이다. 부대찌개는 김치 맛에 의존하고 있고, 또 김치가 없으면 맛이 많이 비게 된다. 신김치의 개운한 산미와 칼칼한 매운맛에 햄·소시지의 단맛과 짠맛이 보태진 음식인 것이다.
누구든, 부대찌개를 먹는 자리에서는 그 유래에 대해 한마디씩 하게 되어 있다. 그때에 꿀꿀이죽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겠지만, 그 꿀꿀이죽의 실체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까지는 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꿀꿀이죽이라는 말에 깊은 향수까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한국전쟁 후 고난의 시대를 이겨낸 민족적 자부심이 이 부대찌개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용산의 부대찌개 집에서 마주치는 미군들에게 이 부대찌개의 역사에 대해…, 아니다. 미군이 이 땅에서 다 떠나고 난 다음에, 갈라진 이 땅이 통일되고 난 다음에, 부대찌개의 ‘전설’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때 너희의 쓰레기도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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