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볼만한 영화 뭐 있어요?” 때로는 “식사하셨어요?”와 다를 바 없는 의례적인 인사지만, 더러는 주식 소스라도 갈구하는 양 매의 눈으로 쳐다보고 서 있는 자들이 있다. “뭘 보면 되냐고요!”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영화의 재미가 내 마음에서와 같이 딴 사람 마음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는 확신이 없을 때. 가까운 예로 〈비우티풀〉 같은 영화. 누구에게는 눈물샘이 터지는 비루한 인생의 비극이련만, 또 누구에게는 고작 분통이나 터지는 지루한 영화의 비극이 되기 쉬운 케이스. 이런 작품일랑 내가 평소 그 사람의 영화 보는 취향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선뜻 ‘강추’와 ‘비추’의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둘째, 영화는 좋은데, 정말 좋은데… 어디 가서 볼 ‘방법’이 없네! 오 주여, 아무리 거룩하고 영롱한 영화일지라도 끽해야 전국 10개관에서 개봉하는 영화를 침 튀기며 추천하기란 몹시 머쓱하고 미안한 일이옵나이다.

그래서 〈완득이〉 같은 영화가 반갑다. 웃음과 박수가 언론 시사회장에서와 같이 분명 개봉관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게다가 전국 개봉관 약 450개. 찾아보기도 쉽다. ‘대충’상업영화가 넘쳐나는 극장가에서 오랜 만에 두 팔 벌려 반갑게 껴안아주고 싶은 진정한 ‘대중’상업영화다.


여기 열여덟 살 도완득(유아인)이란 녀석이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종종 ‘원 펀치 쓰리 강냉이’의 행실로 돌파하는 우리 반 꼴등이자 없는 집 자식. 아버지는 장애인이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내곡동 사저의 제일 작은 방 한 칸을 반으로 쪼개고 그걸 다시 반으로 접으면 이쯤 되겠다 싶은 비좁은 옥탑방에서 라면과 햇반으로 끼니를 때운다. 완득이 말대로 ‘완벽하게 불쌍한 인간’의 완벽하게 불행한 성장기. 한국 영화가 툭하면 어린 주인공에게 선물하는 전형적인 가정환경. 

앞집 옥탑방에는 동주(라고 쓰고 완득이는 ‘똥주’라고 읽는다) 선생님(김윤석)이 산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생님도 많으련만, 1등에게는 “넌 꼭 서울대 가라. 걔들 대가리는 좋은데 싸가지는 졸라 없거든”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머지 애들에게는 “공부 열심히 할 필요 없다. 어차피 세상은 잘난 놈 한두 명이 이끌어가는 거니까”라고 말씀하시는 막말 파문의 ‘담탱이’. 마음 같아서는 교장 선생님이 ‘교육적으로 섭섭합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선생인지 몰랐습니다’ 남몰래 문자라도 보내고 싶을 이 문제 교사가 시도 때도 없이 완득이를 부른다. “얀마, 도완득!”


멘토 ‘똥주’ 김윤식의 연기 탁월

예로부터 위인들에게는 호가 있었으니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그리고 얀마 도완득. 장차 위인이 되라고 붙여준 호일지라도 완득이는 딱 듣기 싫다. 자꾸 자기 인생에 끼어들며 친한 척 하는 ‘담탱이’가 꼴 보기 싫다. 그래서 매일 밤 텅 빈 교회에 홀로 앉아 간절하게 기도한다. “하느님,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똥주는 죽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완득이 인생에 끼어든다. 그리고 어느새 뿌리치지 못할 멘토가 되어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며 개똥의 현실을 미화하거나, ‘사람만이 희망’이라며 가난한 이들의 선함을 맹신하는 한국 영화가 〈완득이〉 전에도 많았다. 대신 〈완득이〉에는 다른 한국 영화에 넘쳐나는 세 가지가 없다. 극단적인 사건이 없고, 악당이 없고, 관객의 눈물샘을 쥐어짤 요량으로 막판에 괜히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다. 밋밋할 거라는 걱정을 편안함으로 받아치고, 뻔할 거라는 선입견은 싱싱한 대사발로 밀어친다. 빈곤, 장애, 이주노동자, 교육과 차별의 문제까지 다 건드리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영화의 착하고 명랑한 태도가 나는 참 좋았다. 나도 꼭 한 명 갖고 싶은 멘토 ‘똥주’ 김윤석의 연기가 특히 좋았다. 요즘 제일 볼만한 영화는, 그래서 닥치고 〈완득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에세이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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