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자크 모노 지음
〈우연과 필연〉은 나를 방황의 연옥으로부터 건져낸 책이다. 문과와 이과라는 어처구니없는 갈림길에서 전적으로 타의에 의해 등 떠밀려 들어간 대학은 내게 미래를 구상하는 곳이기는커녕 끝없는 번민을 안겨주었다. 대학 3년을 전공보다는 인문대학 서성거리기와 동아리 활동에 탕진한 나는 마지막 해를 맞으며 나름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싫건 좋건 운명처럼 처박힌 내 전공인 생물학이 도대체 뭘 하는 건지는 알아봐야 했다.
하루아침에 세상과 칼로 자르듯 결별하고 동물학과 지하 실험실로 기어들어갔다. 당시 서울 종로 골목에 있던 외국 서적 책방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제목이 너무나 매력적인 얇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겉장을 들추자 책 첫머리에 인용된 데모크리토스의 말이 내 가슴 한복판을 파고들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들이다.”
〈우연과 필연〉은 영문과 수업 시간에 무턱대고 따라 읽은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이후 내가 영어로 완독한 첫 책이었다. 이 책은 내게 생물학이 그저 흰 가운이나 입고 세포나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철학을 논할 수 있는 학문이란 걸 알려줬다. 〈우연과 필연〉은 내게 생물학에 몸 바쳐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해준 책이다.
학창 시절 생물학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본 이라면 누구나 오페론 이론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자크 모노는 프랑수아 자콥과 함께 유전자란 일반적으로 단백질 합성 정보를 담고 있는 암호화 부위와 그 발현을 유도하거나 억제하는 조절 부위로 이뤄져 있다는 유전모델을 제시해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화학자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을 통해 내게 다가온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 사상가였다.
나는 당시 그 엄청난 개안의 흥분을 나만의 역사로 붙들어둘 수 없어 요즘 기준으로 보면 완벽한 불법 상행위를 저질렀다. 생물학 전공 선후배에게 물어 명단을 작성한 다음 그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교내 복사실에 부탁해 불법 복사본 수십 권을 제작했다. 넉넉히 제작해 교수님 몇 분께도 드렸다고 기억한다. 끝내 내게 책값을 지불하지 않은 친구가 여럿 있었던 까닭에 상업적으로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업이었지만 나를 포함해 몇몇 이 나라 생물학 교수의 책꽂이에는 아직도 내가 만든 복사본이 꽂혀 있다.
우연과 필연! 이 세상을 설명하는 데 이 두 마디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이 책을 1944년에 출간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1976년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이어지는 생물철학 전통의 맥을 살려낸 책이라고 평가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지 어언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나도 좀 배웠답시고 그의 논리 중 한두 가지에는 이견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책은 내 삶을 바꾼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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