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계는 ‘1999년’에 멈춰 있었다. “1999년에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이 개봉했을 때 차마 보러 갈 수가 없었어요. 아들이 죽는 장면을 그 큰 화면으로 어떻게 보라고….”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복수씨(69)의 아들은 이태원 살인사건의 피해자 고 조중필씨(당시 23세). 어렵사리 다시 입을 떼 당시 심정을 전하던 이씨는 뭔가 생각이 난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아…. 영화 개봉은 2009년이지? 내가 중필이 재판이 끝나고 (패터슨이) 출국한 1999년 후부터는 어떤 해든 1999년이랑 헷갈려요.” 죽은 자식은 있는데 죽인 사람이 없다는 결론을 받아든 한 어머니는 아직도 그 충격 속에서 산다.

서울 강남구 자택으로 이씨를 찾아간 날은 10월12일. 살해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아더 패터슨(당시 18세)이 미국에서 체포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틀 뒤였다. 사실 이씨는 그보다 먼저 체포 소식을 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계절마다 법무부에 전화를 걸어 수사 진행 상황을 물었다. 올 들어 두 번째 했던 전화 통화에서 아들을 죽인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했다. 14년째 집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이사도 가지 않으며 법무부로부터 기다려온 연락이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법무부 직원이 같은 날 오후 다시 전화를 걸어와 “시끄러워지면 괜히 안 좋아질 수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꼭 잡고 싶다는 간절함에 이씨는 그 말을 따랐다. 아직도 일주일에 한 번씩 아들 방이던 지하실로 내려가 책상을 닦는 그였다.


두 차례 개정됐지만, 여전히 미흡

그래도 이씨는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는 ‘법하는 똑똑한 사람’에 대한 불신을 쉽게 씻지 못한다. 사건 수사 단계에서 해당 검사가 “용의자에게 미리 설설 기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용의자였던 에드워드 K. 리(당시 18세)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유가족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정부 부처에서 “우리는 약소국가이고 SOFA가 이러니 참고 살아야 한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98년 4월 재판부는 결국 검찰 수사가 부실하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이씨는 14년간 수렁에 빠진 미제 사건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가해자가 미군이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사건이 흘러왔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진 미군 범죄 피해자들은 자기처럼 억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중필씨 사건만이 아니다. 보통 미군 범죄는 수사부터 재판까지 가는 여정이 험난하기만 하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범죄에 개입할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1966년 처음 체결된 SOFA는 주둔 비용, 출입국 관리 등 주한미군 주둔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조항이 미군 범죄에 관한 형사재판권 부분이다. SOFA가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국내에 널리 퍼지면서 1991년과 2002년 두 차례 개정됐다. SOFA 1차 개정에서는 형사재판권 자동포기 조항이 폐기되었고, 2차 개정에서는 검찰 기소시 신병인도에 관한 조항이 개정되었다.

하지만 SOFA를 더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박정경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사무국장은 “주한미군 범죄는 SOFA 탓이 크다. 주한미군이 범죄를 저질러 경찰서에 가게 되면 먼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특징이 있다. 자신이 주한미군임을 여기저기 알리는 것이다. SOFA의 정확한 내용은 몰라도 그 덕에 자기의 범죄가 가볍게 처리된다는 걸 알고 하는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2만8500명인 주한미군은 미국의 국방전략에 따라 그 수가 계속 줄고 있지만, 범죄는 오히려 늘고 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08년 261건 △2009년 325건 △2010년 380건으로 꾸준히 증가 추세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미군 범죄가 214건 일어났다. 폭력, 절도 및 강도, 성범죄 등 강력범죄가 높은 비중(위의 표 참조)을 차지한다.

특히 22조 5항은 SOFA 개정론자들이 손꼽는 독소조항이다. ‘합중국 군 당국이 요청하면 대한민국 당국은 호의적 고려를 해야 한다’라는 항목이 그것이다. 22조 5항은 피의자 인도·구금·재판 따위 주한미군 범죄를 다루는 법 집행 전반에 걸쳐 자주 거론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초동수사부터 쉽지 않다. 미군 범죄자는 범행 현장에서 잡히거나 부대 복귀 전일 경우만 체포가 가능하다. 아무리 유력한 용의자라고 하더라도 부대에 들어가는 순간 한국의 수사권이 사실상 미치지 않는다. 2000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발생한 서정만씨(당시 68세) 살인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날 밤 미군과 자신의 전셋집으로 들어갔던 서씨가 다음 날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꼽힌 미군은 부대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사하지 못했다. 2002년 해당 군인이 출국을 함으로써 서씨 살인사건은 결국 미제로 끝을 맺었다. 서씨 사건뿐만 아니라 1999년 연달아 발생한 경기도 동두천의 이정숙씨 살인사건, 신차금씨 살인사건 등도 미군이 용의자였지만 수사상 어려움으로 범인을 잡지 못했다. 


한국의 재판권 행사율 고작 22%

살인·강간 등을 저지른 흉악범일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있을 때 △공정한 재판의 기회가 보장될 때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국 쪽에서 피의자 구금(구치소나 교도소 등에 가두어 수사)을 요청할 수 있다. 행여 이 조건이 다 갖춰졌다고 하더라도 구속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한국 경찰이 ‘구속 수사’ 의견을 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민주당 장세환 의원이 입수한 경찰청 자료를 보면, 2006년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지난 5년간 범죄를 저지른 주한미군에 대해 경찰이 구속 수사 의견을 낸 경우는 전체 1463명 중 4명이다. 0.27%에 불과하다. 

 

 

 

 

 

 

이복수씨(왼쪽)는 1997년 아들 조중필씨(위)를 잃었다. 현장에 있던 미군 두 명이 주요 용의자였지만, 수사상의 문제로 이 사건은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 있다.

 

 

재판은 쉬울까.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SOFA는 공무집행 중 범죄와 주한미군 간 범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는 한국이 1차 재판관할권을 가진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SOFA 규정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반전이 펼쳐진다. 부속으로 딸려 있는 SOFA 합의의사록 22조 3항에는 ‘대한민국 당국은 합중국 군 당국의 요청이 있으면 재판권 행사를 포기한다. 단, 재판권 행사가 특히 중요하다고 결정하는 경우는 제외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언제든 미군이 재판권 양도를 한국 정부에 요청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한국의 1차 재판권 행사율을 살펴보면 평균 22% 수준에 불과했다(이 중에서도 성범죄 재판권 행사 비율은 평균보다 낮은 15%에 머물렀다). 그나마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오른 수치다. 2002년만 해도 1차 재판권 행사율은 5%에 불과했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재판까지 간 미군 범죄자가 어떤 형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주한미군사령부 홈페이지(www.usfk.mil)를 참고하면 된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한국 법원에 선 미군은 모두 91명이다. 이 중 한 명은 무죄를 받았다. 유죄를 선고받은 90명 중 실형을 선고받은 미군은 4명에 불과했다. 3명은 집행유예. 나머지 83명(92%)은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최근 잇따른 미군 범죄로 국민 여론이 SOFA 개정 쪽으로 기울자 정부도 뒤늦게 나섰다. 10월13일 외교통상부는 ‘주한미군 관련 태스크포스(TF)’를 상설 운영하기로 했다. 외교부, 법무부, 국방부, 한미연합사, 경찰청, 총리실 등이 참여했다. 이날 태스크포스 회의에서는 SOFA에 따른 문제점을 논의했으되, 현행 SOFA 규정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