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이 흘렀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고시텔은 폭 1m도 안 되는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복도를 따라 들어선 60개 방에서 문밖을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9월17일 새벽 4시30분. R 이병(21)은 술에 취한 ㄱ양(18)을 부축해 3층 ㄱ양의 방으로 데려갔다. 3.3㎡(1평)에 불과한 면적에 책상과 싱글 침대가 놓여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R 이병은 ㄱ양을 침대에 눕혔다. 그는 1층으로 내려왔다가 잠시 뒤 ㄱ양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택시 타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고시텔을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1층 복도에 있는 탁자에 앉아 머뭇댔다. 그러고는 ㄱ양 방으로 다시 올라갔다. 방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ㄱ양 방을 들락거리던 그는 돌아가려는 듯 고시텔을 나섰다. 그로부터 1시간 뒤. 고시텔 1층, 3층 CCTV에 차례로 한 남자의 모습이 잡혔다. R 이병이었다. 


작년 미군 범죄 419건 중 재판 회부 15건뿐

미8군 제2통신여단 소속 R 이병이 부대 동료와 함께 외출을 나온 것은 9월16일. 부대 동료는 지인에게 소개받은 ㄴ양을 불러냈고, ㄴ양은 친구인 ㄱ양과 함께 나왔다. 밤 12시 무렵이었다. 압구정동 근처 클럽에서 맥주 1병씩을 마신 이들은 홍익대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와 소주를 더 마셨다. 새벽 4시가 넘자 R 이병은 술에 취한 ㄱ양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김수진 제공2010년 7월 주한미군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미군범죄가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동두천시 유흥가에 모인 주한미군들.

마포경찰서에 따르면, R 이병은 자고 있던 ㄱ양을 성폭행하고 100만원 상당의 노트북을 훔쳐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10월5일 경찰조사에서 R 이병은 노트북은 훔쳤지만 성관계는 합의하에 한 것이라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나는 (성폭행)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입을 닫았다. 변호사 없이 진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10월12일 그는 미군 관계자가 자리한 두 번째 경찰조사에서 기존 진술을 반복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규정상 미군 범죄자의 경우, 수사에서 재판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는 미국 정부대표가 참여하게 돼 있다. 정부대표 없이 진행된 조사는 증거로 쓸 수 없다. 따라서 한국 경찰은 범죄 현장에서 미군 용의자를 체포해도 미국 정부대표가 올 때까지 초동수사를 하지 못하고 기다려야 한다. 이번 사건은 CCTV와 방에 남아 있던 휴지, 음모 등 R 이병의 성폭행 혐의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확보했기에 수사가 가능했다. R 이병이 구속되면, 2001년 SOFA 개정 이후 주한미군이 구속된 사례는 4건으로 늘어난다.

미군 범죄는 범행 건수에 비해 외부로 드러나는 비율이 매우 낮다. 9월24일 동두천에서 벌어진 ‘엽기적’ 성폭행이 고발되면서 그동안 묻혀 있던 미군 범죄가 쏟아지듯 알려졌다. 미군 2사단 소속 K 이병(21)이 새벽 4시 경기도 동두천시에 위치한 한 고시텔에 무단 침입해 텔레비전을 보던 ㄷ양(18)을 4시간 동안 성폭행하고 현금 5000원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그것이다.

9월4일 주한미군 자녀 5명은 서울 이태원의 한 거리에서 ㅂ씨(27)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았으며 현금 등 20만원어치 금품을 빼앗았다. 10월1일에는 미8군 소속 한국계 미군 A 상병(28)이 강남구 삼성동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서 출입이 제한되자 욕설을 하며 40여 분간 행패를 부렸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을 발로 차고 목을 조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달 사이 알려진 미군 범죄만 네 건이다. 집계되지 않은 범죄를 포함하면 그 수는 서너 배 이상 많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서 미군 범죄는 ‘네버엔딩 스토리’라 불린다.

민주노동당 동두천·양주 당원협의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월16일~5월26일 약 두 달간 동두천경찰서에 접수된 미군 범죄(강도·절도·폭력)는 총 10건. 그러나 이로 인해 조사를 받은 미군은 없다. SOFA 규정에 따르면 한국은 살인, 강간 등 12개 범죄에 국한해서만 미군의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주한미군 범죄 신고가 전국적으로 419건 접수됐지만 벌금형 약식기소 125건, 혐의 없음 231건, 기소중지 등 기타 69건으로 미약하게 처벌되었을 뿐이다. 용의자가 형사 재판에 회부된 것은 15건에 불과하다. 미군 범죄는 여론이 빗발쳐야 수사가 가능하다.


ⓒ시사IN 조남진성폭행 혐의를 받은 R 이병(오른쪽)이 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제임스 서먼 주한미군 사령관은 최근 일어난 일련의 미군 범죄에 대응해 10월7일부터 한 달간 주한미군의 야간통행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지난해 7월 주한미군 야간통행금지가 전면 해제된 뒤 1년 3개월 만에 다시 시행되는 것이다. 존 존슨 미8군 사령관은 10월8일 새벽 2시부터 한 시간 정도 서울 이태원 일대 미군이 자주 찾는 유흥가를 직접 순찰하면서 “30일간 통금 조치를 취하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되면 통금 기간을 연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박정경수 사무국장은 “주한미군은 장병 가족에게 미군이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과 배치되는 야간 통금을 계속 유지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오프리미트’ 구역, 사실상 유명무실

주한미군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약 9년간 야간통행금지를 시행해왔다. 이 조치는 미군 장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했지만 한국인을 미군 범죄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했다. 2008년 말, 시범적으로 주말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축소한 결과 통금 해제가 더 많은 범죄를 낳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2009년 4월 월터 샤프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통금이 해제된) 6개월간 성폭행, 심각한 폭행, 무질서한 행동이 모두 증가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주한미군은 부대 내 교육 프로그램 외에 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지난해 7월 통행금지를 전면 해제했다. ‘주한미군 가족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대신 주한미군은 용산, 의정부, 오산, 대구, 군산 등 이전에 범죄가 발생했거나 범죄 발생 가능성이 큰 미군부대 인근 지역은 ‘오프리미트(Off-Limit·미군 출입제한 지역)’로 정해 특정 지역에 대한 출입을 전면 금지해왔다. 현재 서울에 지정된 오프리미트는 52곳에 이른다.

이번에 사건이 발생한 홍익대 인근 또한 오프리미트이다. 2007년 1월 동교동 주택가에서 미8군 2사단 소속 G 이병(당시 23세)이 60대 여성을 끌고 다니면서 성폭행해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이때 주한미군은 홍익대 일대를 출입제한 지역으로 지정했다. 밤 9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주한미군과 군 가족은 이 지역에 들어갈 수 없다. 홍익대 앞 클럽 곳곳에는 ‘미성년자와 주한미군 출입금지’라고 적힌 팻말이 있다. 하지만 단속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법적인 조치가 미흡해 오프리미트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R 이병이 술을 마신 호프집과 성폭행이 일어난 고시원은 모두 홍익대에서 100∼200m 떨어진 오프리미트 구역이었다.

시민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기 동두천시 지행동에 사는 김은미씨(45)는 “중학생 딸만 둘이라 매일 저녁마다 불안하다. 미군 부대가 없어지든 이사를 가든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SOFA 규정이 당장 개정되지 않는 한 한국인에게 야간통행금지는 미군 범죄로부터 한국인의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일시적인 통행금지가 실질적 대책이 될 수는 없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유영재 미군문제팀장은 “불평등한 SOFA 규정이 범죄의 온상이다. 한국 정부가 온당한 수사권·기소권·처벌권을 확보한다면 장병 스스로 자제력을 갖게 되고 미군 범죄 또한 줄어들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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