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뒤집어 보면 그늘도 있다. 성을 바꾸어야만 아이가 보호될 만큼 이혼에 대한 편견이 깊다는 얘기다. 부모 이혼으로 인한 아이의 고통은 사회의 편견 때문에 배가된다. 한 가정 안에 두 가지 성이 공존하는 것이 용인되는 문화라면 굳이 아이 성을 바꿀 이유가 없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궁여지책으로 성씨 개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을 바꾸는 것은 아이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대다수가 혈연을 매개로 성씨를 받는 문화에서 ‘어머니의 남편’의 성을 평생 갖는 것은 뿌리를 거세당한 결핍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가 친부를 계속 만나는 경우는 늘 그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아이에게 이상적인 것은 미국 영화에 종종 나오는 이혼 가정 풍경이다. 재혼한 어머니와 사는 자녀를 위해 친아버지, 새 아버지, 어머니가 다함께 어울리는 모습이다. 나는 요즘 이 낯선 장면이 이혼 가정 아이들을 가장 근원에서 배려한 것임을 깨닫는다. 이 장면의 핵심은 이혼 피해자인 아이를 위해 가해자인 부모 세대가 모두 현재 결혼에서 불편을 조금 감수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강한 애착을 적당히 해소하면서 새 부모와의 관계도 쌓아가도록 한다. 이 경우 아이에게 친부모와의 관계는 ‘질긴 혈연에 대한 부분 긍정’, 새 아버지와의 관계는 ‘호의적인 사회관계’의 경험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게 정직하고 성숙한 태도 같다. 이혼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정확히 인정하는 점에서 정직하고, 아이를 보호 대상이 아니라 인격체로 보고 부모가 가해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진다는 점에서 성숙하다.
혈연을 긍정하면서 새 가족관계 경험하는 기회 줘야
한국의 재혼 가정은 이전 배우자와 거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새로운 가정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를 위해서는 성을 바꾸는 길밖에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아이에게 ‘어떤 경우든 현재 아버지와 성씨가 같아야 한다’는 도그마를 오히려 강화해준다. 그런데 아이의 성은 ‘남들과 같은 아버지의 성’이 아니다. 아이가 바뀐 성을 뿌리에 대한 결여로 해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이 방법은 개명 비용을 아이의 먼 훗날로 지불 유예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씨 개명은 한창 예민한 성장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이긴 하지만, 그 발상의 기저에는 재혼 부부의 불편을 피하기 위한 ‘현재 부부 중심주의’가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를 위해 바꿔야 할 것은 성씨가 아니라 한 가정 안에 다른 성씨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시선과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닌 보호자로 가정하는 재혼 부부의 강자 중심 사고가 아닐까. 가족 안에서도 아이라는 약자는 발언권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