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강이 시작되는 페루 북부 이키토스의 정글 지대. 밤공기는 후끈한 열기와 불쾌한 진동음을 내는 모기의 날갯짓 소리로 가득했다. 아마존으로 흘러드는 우카얄리(Ucayali) 강의 얕은 수로에서 진흙과 나뭇가지에 걸린 배를 빼내느라 두 시간 넘게 씨름한 뒤여서, 리베르타드 마을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가이드 엔리케 씨의 사촌 누이가 사는 오두막집에 들어서니, 식욕은커녕 모기를 쫓기 위해 손사래를 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 좀 들어요.”

엔리케 씨가 부엌에서 희고 걸쭉한 액체가 담긴 컵을 가져오며 말했다.

“기운이 날 겁니다.”
 

ⓒ탁재형 제공마사토를 만들 때에는 유카를 발효된 반죽 상태로 보관하다가 마실 때 물과 설탕을 섞는다.

액체는 시원하고 달콤했다. 살짝 나는 풀 냄새와 시큼한 뒷맛이 갈증을 없애주고, 입맛이 돌게 해주었다. 식도를 넘어간 뒤 느껴지는 꽤나 뻑뻑한 질감은 공기가 빠진 타이어에 바람을 채우듯, 내용물이 없어 반으로 접힌 내 위장을 모양 좋게 펴주는 듯했다. 두 잔만 더 마시면 허기마저 가실 참이었다.

“마사토(Masato)라고 해요. 유카(Yucca)를 발효시켜 만든 술이죠. 정글의 맥주라고 할 수 있어요.”

듣고 보니 혀 뒤에 남아 있다 올라오는 희미한 술기운이 느껴진다. 유카는 카사바라고도 하는데, 생명력이 강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 남미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먹을거리다. 고구마와 무를 반씩 닮았는데, 삶아 놓으면 맛도 그 중간쯤이다. 껍질에는 독이 있어 정글 원주민이 화살을 만들 때 썼다는데, 삶으면 그 독성이 사라진다.

이 유카에서 녹말만을 추출해 가루 형태로 가공한 것이 바로 식품공업에 널리 쓰이는 타피오카 전분이다. 공교롭게도 희석식 소주를 만드는 주정(酒精)의 대표적인 원료가 바로 이것이니, 아마존 정글까지 와서 한국에서 먹는 소주와 친척지간인 술을 만나게 된 셈이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술의 원료가 그 나라와 아무런 상관없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값싼 녹말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어쩐지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무관하게, 마사토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술이었다. 소박하면서도 깔끔하고, 어딘지 모를 거친 맛이 정글의 밤과 잘 어울렸다. 어느새 가져온 병을 다 비우고, 조금 더 줄 수 있는지 물으니 부엌에서 뭔가를 꺼내 오는데, 밀가루 풀처럼 걸쭉한 유카 반죽이다. 마사토를 만들 때에는 유카를 삶은 뒤 잘 으깨어 발효된 반죽 상태로 보관하다가 마실 때 비로소 물과 설탕을 섞어 내온다. 냉장고가 없는 정글 한복판에서, 한 번 삶은 유카는 쉽게 변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효시키면 더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마사토는 우리네 김치처럼 식품의 보존 기간을 늘리는 지혜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기에 먹을 것이 떨어지면 며칠 동안 이 마사토로 버티기도 해요. 몇 잔 먹으면 힘이 나고, 술기운에 기분까지 좋아지죠. 하지만 먹을 것이 없는 현실을 바꿔주진 못해요. 게다가 아이들이 먹을 것이 이 마사토뿐일 땐….”

 

ⓒ탁재형 제공아마존 정글 마을 리베르타드에 밤이 찾아왔다.

 


엔리케 씨가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유카에는 당분이 적어 발효가 바로 일어나지 않을 텐데, 어떤 방법을 쓰는 거죠?”

“아 그거요….”

엔리케 씨가 갑자기 키득거렸다.

알코올 발효는 간단히 말해 당분이 효모균의 작용으로 알코올로 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당분이 풍부한 과일이나 벌꿀로 술을 만드는 것이 더 쉽다. 그 자체로 당분을 함유하지 않은 곡식이나 유카로 알코올을 만들기 위해서는 과실주보다 한 가지 과정이 더 필요한데, 바로 전분을 당으로 전환시키는 당화(糖化)다. 이 당화 기술을 알아낸 것은 인류가 정착 농경을 시작한 이후이니, 곡주는 과실주에 비해 한참 늦게 세상에 등장한 셈이다. 동양에서는 특수한 곰팡이(누룩균)를 이용해 곡물의 당화를 촉진하고, 서양에서는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성질이 있는 몰트(싹이 난 보리)를 섞는데, 아마존 정글 한가운데인 이곳에서는 어떤 방법을 쓰는지 몹시 궁금했다.

“우린 씹어요. 유카 반죽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다 뱉으면 발효가 시작되죠.”

“…….”

갑자기 간밤에 달게 물을 마시고 다음 날 그것이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것임을 발견한 원효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하게 제조한 술 있어

밥을 오래 씹다보면 밥맛이 점점 달게 느껴진다. 이것은 우리 침 속에 들어있는 아밀라아제라는 효소가 밥 속 전분을 당분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누룩이나 몰트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고대인들은 침의 이러한 성질을 발견해 술을 만드는 데 이용했다.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1613년)에는 ‘처녀들이 밥을 씹어 만든 술을 미인주(美人酒)라 한다’는 언급이 있고, 중국이나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도 비슷한 기록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인체 효소를 이용한 당화법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탁재형 제공마을 주민이 삶은 유카를 으깨고 있다.

 

 

햅쌀의 추수를 마친 뒤, 곱디고운 미녀들이 둘러앉아 사탕수수로 이를 닦고, 바닷물로 입을 헹군 뒤 자기들끼리 재잘대는 것도 잠시 잊고, 엄숙하게 쌀을 씹어 술을 빚는 광경이라니! 상상만 해도, 술이 주는 효과 말고도, 만드는 과정에서까지 로맨티시즘을 찾으려 했던 고대인의 풍류가 묻어난다. 그러므로 이 머나먼 아마존 정글까지 와서 고대 인류의 지혜가 담긴 술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인간과 술이 함께한 여정을 탐구하는 여행자와 같은 나로서는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오오~ 제발 엔리케, 당신이 씹은 게 아니라 당신 사촌 누이가 씹은 거라고 말해줘요. 제발.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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