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2005년 11월28일 남편을 살해한 여성 범인이 현장 검증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남편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이상미씨(가명)가 말하는 범행 동기다. 2006년 12월11일. 그녀는 남편을 칼로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이씨를 방에 가두고 때렸다. 심한 욕설은 물론이고 채찍질에 칼로 위협까지 했다. 주변에는 아내 이씨가 정신병자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폭행은 무려 37년간 이어졌다. 이씨는 딸에게 성폭행까지 일삼는 남편을 계속 참고 지켜볼 수 없었다.

 이씨는 ‘살인죄’로 1심에서 징역 2년형(치료감호 6개월 포함)을 선고받았다. 5일 뒤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씨를 면담한 심리전문가는 2심 공판에서 그녀가 ‘정신분열증에 의한 심신 상실 상태’에서 범행에 이르렀다고 증언했다. 변호인은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항소는 기각됐다. 이씨는 ‘심신 상실’이 아닌 ‘심신 미약’에 해당하며 정당방위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사람을 죽인다면 그 대상이 ‘남편’일 가능성은 50%를 넘는다. 충북대 아동복지학과 김영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된 살인범 130여 명 중 53.4%는 남편 살해범이다. 청주여자교도소에는 전국의 여성 살인범 중 96%가 수감되어 있다.

남편을 죽인 여성의 82.9%는 상습적으로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 살해 동기도 44.5%가 폭행이다. 김영희 교수 연구에서 치정을 원인으로 꼽은 응답이 35.2%인데 이 경우도 폭행이 불륜의 원인이 많다. 결국 여성이 남편을 죽이도록 몰아간 원인은 대부분 ‘가정 폭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은 대부분 처음에는 경찰이나 친인척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상미씨도 여러 차례 경찰에 신고했으나 경찰은 매번 ‘가정 일이니 어떻게 할 수 없다’며 돌아갔다고 한다. 경찰이 돌아가면 남편은 신고했다는 이유로 더 때렸다. 

정부는 매 맞는 여성이 남편을 피해 가정에서 나와 머물 수 있도록 ‘쉼터’를 제공한다. 그러나 가해자인 남편은 편하게 집에 머물고, 피해자인 여성만 집 밖에 격리 수용되는 구조다. 미국 등 외국에서는 가정 폭력 가해자를 경찰이 연행해 일정 기간 구금한다.

살인 부르는 ‘매 맞는 아내 증후군’

가정 폭력을 둘러싼 법원의 판결에는 허점이 많다. 배우자 살해 사건 판례를 보면 가해자가 남편일 경우 대부분 ‘폭행치사’, 가해자가 아내인 경우는 80%가량이 ‘살인’으로 판결났다. 여기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완력이 약하기 때문에 폭행을 당하는 상황에서 남편을 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싸우지 않을 때 준비해둔 흉기로 죽이는 사례가 많아 ‘살인’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었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편을 상대로 과잉 자기방어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2005년에는 폭행을 견디지 못해 남편을 살해한 한 여성에게 법원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를 인정하기도 했다.

남 아무개씨는 2005년 소파에서 잠든 남편을 죽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남편은 그날도 남씨를 때리며 장인 장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또 장애인인 처남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술에 취해 죽일 듯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컴컴한 화장실로 숨은 지 50여 분 뒤 남씨는 아령을 들고 나가 잠자는 남편을 내리쳤다.

남씨 사건 변론을 맡은 박범길 변호사는 정신과 진료 기록을 토대로 무죄를 주장했다. 그녀는 이전에 남편의 학대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심신이 허약해진 상태였다. 재판부는 남씨가 ‘의식적 장애 상태’에 있었다는 점 등을 받아들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그럼에도 가정 폭력으로 남편을 살해한 여성 측은 ‘정신이상’이나 ‘심신미약’이라는 증거를 내세우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할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는 아무리 가정 폭력에 시달려왔다 하더라도 ‘정당방위’가 인정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전화 유리화영씨는 “정당방위가 인정되려면 가해자의 자기 변호 의지가 강해야 하지만 결과가 ‘살인’이므로 대다수 여성은 죄책감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를 잘 표현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살인 범죄에서 ‘정당방위’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국내 법조계의 분위기도 문제다. 미국에서는 정당방위나 긴급 피난을 인정해 폭력 남편을 죽인 여성이 무죄로 풀려난 사례가 많다.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처벌인가 면죄부인가

가정 폭력을 다루는 사회 시스템이 피해자인 여성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까닭은 법률이 남성 시각을 중심으로 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피해자 구제보다는 ‘가정의 유지’를 우선해서 법과 제도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1998년 처음 제정돼 올해로 10년을 맞은 가정폭력방지법은 그동안 11번 바뀌었다. 가정 폭력의 범위가 사회 인식의 변화와 함께 바뀌므로 법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전화 유리화영씨는 “국회의원 대다수가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법률이 통과되는 과정이 험난하다”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8월부터는 가정 폭력 가해자에 대한 ‘상담조건부 기소유예’ 제도가 도입됐다. 부부가 한국가정법률사무소에서 제공하는 상담 프로그램에 응할 경우 기소하지 않는 제도이다. 여성계는 이 제도에 대해 ‘결국 폭력 남편에게 면죄부를 준 꼴’이라며 반발한다. 가해자에 관한 처벌을 민간 기관에 위탁한 점도 논란거리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측은 가정 폭력 범죄자에 대해 기존에 단순기소유예 처분이 나오던 사건이 지나치게 많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담’이라는 처벌이라도 받게 하자는 취지라는 것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위원은 “6개월간 꾸준히 상담을 받아야 한다. 받다가 차라리 유치장에 가는 편이 낫겠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처벌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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