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이 죽도록 미울 거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는 인터뷰를 지켜보다 수도권 한 의원이 한 얘기다. 그의 말에는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상황 자체를 마뜩잖게 여기고, 지원 유세에 나서는 것도 꺼렸지만, ‘상황 논리’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됐다는 해석이 깔려 있다.

이런 판단은 친이·친박을 떠나 대다수 한나라당 의원이 공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번 서울시장 보선은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선 일정표에 없던 ‘돌발 변수’라는 얘기다. 박 전 대표 처지에서 보면 서울시장 보선이 없었을 경우 내년 대선까지 탄탄대로였다. 여야 통틀어 지지율이 압도적이었고, 그를 능가할 잠재 후보도 보이지 않았다. 올해 정기국회가 끝나면 곧바로 총선 정국으로 돌입하고, 내년 총선에 출마할 여권 인사들은 계파 가리지 않고 박 전 대표 앞으로 앞다투어 줄을 설 참이었다. 


ⓒ뉴시스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나경원 후보 지원에 나서자 야권 캠프가 긴장하고 있다.

재·보선 ‘41대0’ 신화 일군 선거의 여왕

그런데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면서 스텝이 꼬였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대세론이 무너진 것이다. 바람처럼 등장한 안철수 원장(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에게 지지율 1위 자리를 내주면서 “박근혜도 별거 아니구나” 하는 인식이 퍼졌다. 민주당의 한 서울 지역 당협위원장은 “과거처럼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박근혜는 더 이상 아니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박원순’이라는 시민사회 진영의 상징적 인물이 선거에 뛰어들고, 야권 단일화 경선 등을 거치며 야권 전체에 역동성이 생긴 것도 박 전 대표 측에서 보면 반갑지 않은 대목이다.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야권 통합 논의에 새로운 동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친박근혜 인사들은 이번 서울시장 보선이 대선 전초전으로 비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특히 박근혜-안철수 간 대리전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박 전 대표는 10월6일 “이번 선거는 대선과는 관계없는 선거다”라고 선을 그었고, 친박계로 분류되는 유승민 최고위원은 같은 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선이 아직 1년2개월 남았다. 그 사이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안철수 교수가 (박원순 후보의) 선거를 돕더라도 그게 대선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다”라고 말했다.

시작은 흔쾌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좋으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박 전 대표가 선거 지원 의사를 밝히면서 나경원 캠프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색인 데 비해, 야권은 긴장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박 전 대표가 지원 유세에 나서는 게 처음이지만, 2004~2006년 치러진 재·보선에서는 ‘41대0’의 전승을 거두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참여한 25.7%를 다 한나라당 지지표라 해도 25.7%+α가 필요한데 이 ‘플러스 알파’를 박 전 대표가 새로 창출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여당 후보로서 표를 달라고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 저축은행 사태, 정권 실세들의 비리 의혹과 구속, 경제위기 등 잇달아 불거지는 현안이 정권 심판론을 피하기 힘든 쪽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돌발 변수도 여권에 부정적인 쪽으로 자꾸 터지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 인사는 “도가니 신드롬 때문에 나경원 후보가 5%는 잃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 후보가 장애인을 목욕시키는 장면을 공개한 것이 영화 〈도가니〉 때문에 가뜩이나 불편해진 여론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시사IN 조남진박원순 후보(오른쪽) 뒤에는 안철수 원장이라는 막강한 ‘원군’이 있다.

이번 선거의 주 무대가 서울이라는 점도 박 전 대표에게는 불리하다. 여론조사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박 전 대표는 영남과 충청에서 강세이고, 수도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세다. 게다가 ‘플러스 알파’로 끌어들여야 할 대상은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이 취약한 젊은 층이다. 반면 박 전 대표의 맞상대로 꼽히는 안철수 원장은 바로 이 플러스 알파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열심히 움직여서 선거판을 달구고 그것이 안철수 원장을 견인해낼 경우 판세는 오히려 박 전 대표에게 불리한 쪽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국민일보〉와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GH코리아가 10월5일 서울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나경원-박원순 후보 간 맞대결 지지율이 35.6% 대 45.5%였는데, 박근혜 전 대표가 나경원 후보를, 안철수 원장이 박원순 후보를 적극 지원할 경우를 가정한 조사에서는 나경원 36%, 박원순 47.6%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인증샷 놀이’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 불리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투표) 인증샷 놀이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박 전 대표에게는 곤혹스러운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투표율이 높아지는 게 박 전 대표에게는 불리할 수 있는데, 인증샷 놀이는 젊은 층의 투표율을 높이는 놀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시장 선거의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해서인지 박 전 대표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다. 나경원 후보를 지원하겠다고 하면서도 “이번 선거는 서울만 있는 게 아니다”라고 범위를 넓혔다. 행여 서울시장 선거에 패하더라도 그 충격을 분산시키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하지만 부산 동구청장 선거의 경우 또 다른 잠룡으로 꼽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총대를 메다시피 한 터라, 안철수 피하려다 문재인과 맞닥뜨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친박 진영의 한 인사는 “안철수야 나오든 안 나오든 잃을 게 별로 없지만, 박 전 대표는 지면 치명적이다. 수도권 경쟁력이 약하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수도권 의원들은 총선에서 다른 ‘얼굴 마담’을 찾으려 할 것이고, 전국적으로도 이탈 세력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번 선거에 박 전 대표를 굳이 끌어내려는 건 그야말로 ‘박근혜 죽이기’다”라고 분노했다. 

기자명 이숙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ok@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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