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산타마리아에 도착한 건 저녁 6시가 다 되어갈 즈음이었다. 아침 9시에 쿠스코를 출발해 3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해발 4300m의 아브라 말라가에 도착해, 다시 자전거를 타고 다섯 시간을 내리 달린 우리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침 카르나발 축제 기간이라 만나는 산골 마을 사람들마다 우리에게 물을 뿌려대는 통에 온몸은 말 그대로 젖은 솜처럼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추픽추를 향해 3박4일간 이어지는 잉카 정글 트레일의 첫날 일정에 불과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당에 모여 앉았을 때, 호세는 스페인어로 칠레에서 온 카롤리나와 농담을 주고받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이 친구를 우리 취재팀의 영어 가이드랍시고 데려왔는데 할 줄 아는 영어라곤 숫자와 “좋아” “나빠” “오케이” 같은 간단한 표현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탁재형 제공페루 잉카 정글 트레일 첫날 저녁. 왼쪽에서 세 번째가 탁재형 PD, 네 번째가 페루 가이드 호세 씨다.

 


“호세, 이리 와봐. 넌 영어 가이드라면서 왜 영어를 못해?”

“아니다, 호세. 영어 가이드.”

“그래? 그럼 내일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하면 30달러 다 주고 아니면 20달러밖에 못 주겠어.”

“……?”

“(한숨 한 번 쉬고) 너, 영어 잘해. 30달러. 아니면? 20달러. 내일부터. 오케이?”

“노노노노노노!!! 요 아블로 앙글레스 무이 비엥! 투 아스 디초 트렌인타 돌라레스, 카람바!”

“(다시 한숨 한 번 쉬고) 요 노 아블로 에스파뇰(난 스페인 말 못 알아들어).”

“너! 스페인 말 아주 잘하는구나! 그럼 노 프로블럼!”

“…….”

“게다가 호세, 케추아어(페루 원주민이 사용하는 언어) 아주 잘한다!”

‘어쩌라고….’

말해 무엇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게다가 우린 이미 안데스의 첩첩산중까지 들어와버린 참이다. 하지만 그 대화 이후 호세는 부쩍 긴장했는지 뭐든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한동안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그는 식사를 마친 일행 앞에 자랑스럽게 피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거 내가 잘 만든다. 페루 최고, 맛 최고다.”

그 안에는 하얀 거품을 머리에 인 노란 음료가 넘실대고 있었다. 일행이 모두 마시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양이었다. 입에 가져가자 섬세한 거품이 윗입술을 간질인다. 조심스럽게 잔을 더 기울이자, 차가운 솜사탕 같은 거품을 헤치고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하지만 상냥했던 첫인상은 이내 톡 쏘는 향기로 바뀌며 피곤했던 몸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내가 마신 것은 페루의 국민 칵테일, ‘피스코 사워’(Pisco sour)였다.

페루의 어느 술집에서든 맛볼 수 있는 피스코 사워는 발효시킨 포도즙을 증류해 만든 남미식 브랜디 피스코에 시럽과 레몬즙을 더한 것이다. 여기에 첨가되는 또 한 가지 요소인 달걀흰자는 자칫 시고 자극적일 수도 있는 맛에 부드러운 질감을 더해준다. 마지막으로 풍성한 거품 위에 살짝 뿌려진 계핏가루에 눈이 미치면, 어느새 잔은 비어 있고 손은 다음 잔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여섯 명이 두 순배씩 돌아 피처 하나를 다 비워갈 때쯤, 내가 물었다.

 

 

 

 

 

 

ⓒ탁재형 제공엘 카타도르 와이너리 뜰 안에 있는 와인 발효 토기들.

 

 

“그럼 피스코는 페루의 대표적인 술이겠네?”

“무슨 말씀을! 칠레산이 훨씬 품질이 좋아. 페루 사람들이 자꾸 피스코가 자기네 술이라고 우길 때마다 속상해 죽겠어.”

“맞아. 일단 우리 칠레는 포도부터 다르잖아.”

칠레에서 온 카롤리나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열을 올렸다.

“뭐? 노노노노! 피스코, 원래부터 페루 것이다. 칠레, 도둑질하려 한다. 페루 피스코, 최고!” 갑자기 영어가 유창해진 호세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무슨 섭섭한 소리를!”

‘피스코 고향’에서 발효 토기 3000개 본 뒤…

그날 밤, 나는 본의 아니게 남미에서도 가장 해묵은 논란에 불을 붙인 셈이 되고 말았다. 피스코가 과연 페루 것인가, 칠레 것인가는 두 나라 사람들 사이의 오래된 논쟁거리다. 페루는 피스코가 자국의 인디오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니만큼 자국 술에 대한 고유한 명칭이라 주장하고, 칠레는 남미에서 생산되는 포도 증류주의 일반 명칭이란 주장을 펴고 있다.

 

 

 

 

 

 

 

ⓒ탁재형 제공카라스코 씨가 라임 향을 첨가해 직접 만든 술 ‘피스코 시트롱’을 보여주고 있다(위 오른쪽).

 

 

2010년 다시 한번 페루를 방문했을 때, 취재 도중 잠시 짬을 내어 포도 재배의 중심지이자 피스코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이카(Ica)를 방문했다. 150년 동안 6대에 걸쳐 피스코를 만들어온 엘 카타도르 와이너리의 소유주 엔리케 카라스코 씨가 뜰 안에 늘어선 토기 단지 3000개를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을 때, 나는 페루 사람들 편이 되기로 작정했다.

“17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에 포도를 심고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오크통을 만들 나무가 없다는 거였죠. 대신 그들은 인근에 살던 피스쿠(Pisqu) 인디오들이 사용하던 이 토기를 발견했어요. 잉카의 술이었던 ‘치챠’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이던 것인데 와인을 발효시키기에도 그만이었죠. 지금은 이 토기들을 ‘보티하’(Botija)라고 부르는데, 예전엔 이것 자체를 피스코라고 불렀습니다.”

아아, 고향에서 즐기던 술을 이역만리 남미에서 만들어낸 순간 스페인 사내들이 느꼈을 환희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와인을 가지고 떨리는 심정으로 첫 증류를 마쳤을 때 피어올랐을 피스코의 향기는 또 어땠을까 말이다. 오래된 술도가의 정취에 내가 잠시 말을 잊을 동안, 카라스코 씨는 최고급 피스코 ‘모스토 베르데’(Mosto Verde)의 마개를 땄다. 코 안쪽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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