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반죽으로 국수를 만드는 방식에는 납면법(拉麵法), 절면법(切麵法), 압착법(壓搾法)이 있다. 납면법은 중국집 수타면 뽑는 방식을 떠올리면 된다. 탄력성 좋은 밀가루가 있어야 이 국수 제조법을 쓸 수 있다. 절면법은 곡물 반죽으로 반대기를 만들고 이를 돌돌 만 뒤 썰어서 국수를 만드는 방법이다. 칼국수가 이 제조법으로 만든 대표적 음식이다. 절면법은 곡물 반죽의 탄력이 좋지 않아도 된다. 압착법은 구멍이 송송 뚫린 분창이라는 틀에 곡물 반죽을 넣고 눌러 뽑는 방식이다. 냉면이나 막국수를 이 방식으로 만든다.

근대 이전 한반도에서는 절면법과 압착법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수를 만들 수 있는 곡물이 메밀·녹두·수수 같은, 탄력이 좋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납면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밀 재배가 일부 있었으니 납면법을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한반도의 토종 밀은 연질밀로 글루텐이 적어서 탄력 좋은 반죽을 얻지 못하므로 납면법으로 가느다랗고 식감 좋은 면을 만들기에는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황교익 제공성북동과 혜화동 칼국수는 건진칼국수인데, 쇠고기국물에 국수와 애호박을 넣고 한소끔 더 끓여내는 방식이다.

절면법과 압착법 중 널리 쓰인 것은 절면법이었을 것이다. 압착법은 국수틀이라는 다소 큰 기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가마솥 위에 이 국수틀을 올려 국수를 뽑자면 장정 셋은 필요하다. 이에 반해 절면법은 홍두깨와 칼만 있으면 여자 혼자서도 잘 만들 수 있다. 요즘 들어 칼국수를 한자로 흔히 도면(刀麵)이라 쓰는데, 잘못이다. 도면은 반죽을 두툼하게 만든 뒤 돌돌 말지 않은 상태에서 칼로 써는 음식을 말한다. 우리말로 하면 칼싹두기이다. 칼국수는 오래전부터 절면(切麵)이라 했다. 이 둘을 구별해 써야 한다.

한반도에서 메밀은 흔하고 밀은 귀했다. 메밀에 녹두의 전분을 더하여 절면법이나 압착법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밀 칼국수는 서울 양반집에서도 귀한 손님이 왔을 때에야 내놓을 수 있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게 일제강점기에 바뀐다. 일본에서는 밀 재배 면적이 꽤 되어 한반도로 수출되었다. 그때에 밀가루 음식은 일반의 음식이 되었다. 또 이 밀과 함께 일본 우동이 들어와 한반도 국수의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정치인의 단골 식당이 된 칼국숫집

광복이 되면서 한국의 먹을거리는 많은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미국은 농업 강국이었다. 잉여 농산물인 밀을 신생국에 싸게 넘겼다. 신생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 방법이었던 것으로 이 일을 해석하기도 하지만, 식량이 절대 부족했던 한반도의 주민 처지에서는 값싼 밀은 ‘고마운 것’이었다.


ⓒ황교익 제공성북동과 혜화동의 칼국수는 면이 가늘다.
1969년 박정희 정부는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 쌀을 아끼자는 절미운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어온 정책이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분식의 날을 정하면서 그 강도를 올렸다. 전국의 모든 식당에 수요일과 토요일에는 분식을 팔게 했다. 가정에서도 이날에는 분식을 하도록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박정희도 육영수가 해주는 칼국수를 먹는다고 언론에 보도를 했다. 신문에는 칼국수 조리법이 수시로 실렸으며, 식품영양학자들이 나서서 칼국수는 건강에 좋고 전통적이며 맛있는 음식이라는 관념을 국민의 머리에 각인시켰다.

분식의 날이 제정되던 바로 그해인 1969년, 성북동과 명동에 지금은 서울 칼국숫집의 상징이 된 국시집과 명동칼국수(현재의 명동교자)가 각각 개업했다. 이 두 칼국숫집은 칼국수가 서민의 음식이라는 기존 관념을 깨는 전략을 구사했다. 조선 양반가의 전통이 그 칼국수에 담겨 있는 듯이 소문을 냈다. 성북동의 칼국수는 쇠고기 국물을, 명동의 칼국수는 닭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했다. 또 성북동은 경상도식 건진국수 전통을 따랐다 했고, 명동은 충청도식 제물국수 전통이라 주장했다. 칼국수를 맹물에 삶아 건진 후 국물에 담아내면 건진국수, 처음부터 국물에 칼국수를 넣고 끓이면 제물국수라 한다.

이 두 칼국숫집은 개업하자마자 정치인의 단골 식당이 되었다. 당시는 여야 관계없이 이 분식의 날에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명색이 정치인이니 서민과는 그 격이 다른, 그러니까 전통이라 할 만한 ‘국물’이 담겨 있을 것 같은 칼국수를 먹으려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칼국숫집은 그 주요 손님으로 인해 차별화되었다. 명동은 주변에 사무실이 많고 백화점 등 쇼핑 공간도 있으며 남산이 가깝다. 따라서 명동칼국수는 평일에는 직장인, 주말에는 가족의 외식 공간이 되었다. 또 1990년대 이후에는 명동에 일본인 관광객이 몰리자 그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으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에 성북동의 칼국수는 오랫동안 정치인의 칼국수 노릇을 했다. 특히 김영삼 대통령이 이 칼국수에 강한 애착을 보였는데,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이 식당의 요리사를 불러 칼국수를 해달라고 해서 먹었다.

성북동의 국시집은 핵분열을 해 스타일이 흡사한 여러 칼국숫집을 그 인근의 혜화동에까지 퍼뜨렸는데, 현재도 이 칼국숫집에 가면 낯익은 정치인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유독 칼국수를 좋아하는 유전자라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원조 칼국수 정치인 박정희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칼국수만 먹는다고 욕까지 먹었던 김영삼도 이제 권력의 저 바깥에 있는데, 왜 아직 성북동과 혜화동 칼국숫집에는 정치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까.


ⓒ황교익 제공성북동과 혜화동 칼국숫집의 간판은 작다(아래). ‘아는 사람들끼리의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성북동과 혜화동의 칼국숫집에는 칼국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곁들이는 음식에 수육 또는 석쇠불고기, 그리고 문어숙회와 부침개가 있다. 부침개는 어전과 육전으로, 제사 음식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문어숙회도 경상도에서는 제사 음식이다. 부침개와 문어숙회 이 두 음식만으로도 이 칼국숫집은 경상도의 전통을 잇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또 한반도 어디에든 있었을 법한 건진국수 조리법을 두고 이 칼국숫집에서는 경상도식임을 강조한다.

박정희 이후 한국의 권력을 쥔 세력은 경상도 출신이다.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한국인의 지연 중심 사고는 견고하다. 성북동과 혜화동의 칼국숫집은 경상도의 공간이니, 지연이 곧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이 공간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권력 안에 들어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경상도의 공간에서 경상도식의 음식을 먹으며 경상도식 칼국수를 사랑했던 경상도 출신의 권력자에 대해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게 될 것인데, 이 모든 것이 권력의 달콤함을 추체험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더없이 달콤한 공간일 것이다. 그래서 이 칼국숫집들의 간판은 보일 듯 말 듯 아주 작다. 그들만의 공간이니 소문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무의식적 합의가 그 간판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권력은 나누는 것이 아니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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