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가게 되면 그라파나 한 병 사와라.”

“그라파요?”

“응, 이탈리아 사람들 마시는 소주 같은 술 있어. 가격도 별로 안 비싸고. 가끔 생각나는데 한국에선 구할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지금부터 10년 전 이야기다. 〈도전! 지구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외주 제작사의 조연출로 방송 경력을 시작한 나는 난생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그것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떠나게 되었다. 출국을 앞두고 학교 선배들을 만난 자리에서,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했던 한 선배가 나에게 던진 이야기는 내 술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연하고 또 당연한 사실이지만, 유럽엔 위스키와 코냑 말고도 나라별로 저마다 다른 전통술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 셈이다.

 

ⓒ탁재형 제공유서 깊은 그라파 증류소 겸 판매점인 그라페리아 나르디니의 내부 모습(위).

 


하지만 호랑이 같은 감독님을 모시고 떠났던 나의 첫 출장은 그라파의 ‘그’자도 떠올리지 못할 악몽 같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한국에서 촬영용 조명을 깜빡 잊고 안 챙겨온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평생 들을 욕의 절반을 30분 만에 ‘클리어’했는데, 다음 날 아침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말았다. 출연자분과 감독님의 식사로 라면을 준비하면서 물을 에스프레소 머신의 스팀으로 끓여보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하는 바람에(유럽에선 물을 그렇게 끓이는 줄만 알았다) 생라면을 씹게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리알토 다리를 배경으로 지나가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멈춰 서서 바라볼 정도로 욕을 먹는 가운데, 선배가 부탁한 그라파에 대한 기억은 대뇌의 변방으로 조용히 물러가고 있었다.


포도즙 찌꺼기를 증류해 와인보다 진하고 달콤

그로부터 3년 뒤, 프리랜서 PD가 된 나에겐 좀 더 여유로운 일정으로 이탈리아를 돌아다니며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한 방송사의 해외 풍물 프로그램에 이탈리아 북부를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라파라는 단어가 다시금 대뇌피질의 중앙부에 등장했음은 물론이다. 베네치아의 상술과 비싼 물가에 심신이 지쳐갈 무렵, 나는 불빛에 홀린 나방처럼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라파는 포도가 주원료라는 점에서 브랜디의 일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어원이 네덜란드어로 ‘불에 태운 포도주’(burnt wine)를 뜻하는 ‘브란데베인’(brandewijn)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브랜디는 와인을 끓여 그 속의 알코올 성분만을 추출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술로는 프랑스의 코냑, 터키의 라키(Laki)와 그리스 크레타의 치쿠디아(Tsikoudia), 그리고 페루에서 생산되는 피스코(Pisco) 따위가 있다. 하지만 그라파는 한 가지 면에서 다른 모든 브랜디와 다르다. 와인을 증류하는 것이 아니라, 와인용 포도즙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발효시킨 뒤, 그것을 증류해 얻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전자에 비해 훨씬 달콤하고 진한 맛이 난다.

 

 

 

 

 

 

ⓒ탁재형 제공바사노의 랜드마크인 알피니 다리.

 

 

그라파의 어원에 대한 설명은 몇 가지가 있다. 포도송이를 뜻하는 그라폴로(Grappolo)라는 단어에서 왔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바사노 델 그라파에 사는 사람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의 도시를 병풍처럼 휘감고 있는 그라파 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어느 쪽이 맞든, 바사노 델 그라파를 빼놓고 그라파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곳이야말로 그라파의 수도라고 할 만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바사노의 역사는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로마 병사가 포도주를 증류해 그라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중동 지역에서 8세기가 되어서야 발달하기 시작한 증류 기술이 유럽에 전해지기까지는 또다시 200년이 필요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는 단지 전설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도, 이 도시에는 18세기부터 전통 방식대로 그라파를 제조해온 증류소들이 즐비하다.

 

 

 

 

 

 

 

ⓒ탁재형 제공그라파는 향기가 좋아 각종 요리에도 많이 활용된다. 사진 속 그라파는 18개월 이상 숙성시킨 리세르바다.

 

 

바사노를 관통해 흐르는 브렌타 강에는 1569년에 만들어진 알피니 다리가 아름다운 모습을 뽐낸다. 랜드마크이기도 한 이 다리의 동쪽 끝에는 이 도시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그라파 증류소 겸 판매점이 자리 잡고 있다. 1779년 보르톨로 나르디니는 이곳에 위치한 주막을 매입해 자신의 이름을 딴 ‘그라페리아 나르디니’(Grapperia Nardini)를 개업했다. 그 후로 230년이 지나도록 전통 방식 그대로 그라파를 생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호기롭게 바사노의 관광 안내 센터를 통해 방문 사흘 전 통보에 가까운 방문 계획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르디니 그라파의 홍보 담당 직원은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알피니 다리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서, 그라파를 응용한 각종 요리와 함께 나르디니 그라파의 정수라 할 수 있는 5년산 리세르바(Riserva)를 맛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라파는 증류 후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병에 담기 때문에 투명하다. 하지만 개중에는 위스키나 코냑처럼 오크통에 담아 세월의 향기를 더하는 것도 있다. 그중에서도 18개월 이상 숙성시킨 녀석들에게만 리세르바라는 이름이 허락된다.

특유의 튤립 모양 유리잔에 담겨 영롱하게 빛나는 술잔을 바라보니 마시기도 전인데 취기를 닮은 흥분이 밀려온다. 이름을 전해 듣고 대면하기까지 걸린 짧지 않은 시간이 감정을 더욱 고양시켜주는 모양이다. 눈이 충분히 즐길 시간을 주고 나서 천천히 술잔을 입에 가져간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는 포도를 수확한 그날, 농가의 소녀들이 맨발로 포도 알갱이를 으깨던 현장의 냄새다. 가볍게 털어넣자 농축된 건포도 향기가 가슴속을 가득 채운다. 동시에 달콤한 불길이 식도를 타고 달린다. 발랄하면서 섬세하고,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달콤함이 비강 속에 오래도록 머물며 잠시나마 세상살이가 만만할 수도 있겠다는 낙천적인 생각의 꽃구름을 피워올린다. 세상은 넓고, 맛난 술은 많다.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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