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순대를 흔히 신림시장 순대라 부른다. 시장 좌판에서 시작된 음식이라는 흔적이 이름에 남아 있다. 1990년대 초에 시장을 허물고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그 건물에 순대 가게가 여럿 들어가 영업을 하고 있다. 이를 신림동 순대 타운이라 부른다. 2개 동에 나뉘어 가게가 60여 개 있다.

나는 1982년 겨울부터 14개월 동안 공군사관학교(지금의 보라매공원 자리)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했다. 가슴팍에 방위 마크가 달린 ‘개구리복’을 입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 출퇴근했다. 퇴근을 하면 방위 동기와 으레 신림시장에 순대를 먹으러 갔다. 여기에 막걸리가 항상 따랐다.

신림시장은 신림동 사거리에 있었다. 시장은 지붕으로 덮여 있었다. 지붕 안의 공간은 높고 넓었다. 시장 한 귀퉁이에서 보면 건너편의 사람이 가물거릴 정도였다. 그 사이에 순대볶음을 파는 좌판이 10여 곳 있었다. 주인이 커다란 불판을 앞에 두고 앉았고, 그 앞으로 손님이 앉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주인이 불판에 순대와 채소를 볶아서 접시에 담아 내어주었다. 가격은 무척 쌌고, 그래서 이 지역의 노동자, 대학생 그리고 방위들이 많이 먹었다.


ⓒ황교익 제공신림동 순대는 볶음이다. 하얀색·빨간색 두 종류가 있는데,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하얀 것을 백순대라 하고 이를 ‘원조’로 여긴다(오른쪽).
군 면제면 신의 아들, 방위병이면 장군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당시 공군사관학교 방위 중에는 빈자의 아들이 더 많았다. 방위는 출근하지 않으면 탈영자가 되는데, 이런 사고가 허다했다. 헌병에게 잡힌 그들의 변명은 이랬다. “가족 중에 돈벌이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노가다 뛰느라 출근 못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서울로 유입되기 시작한 농촌 인구는 초기에 서울 돈암동·신당동·아현동 등지에 진을 쳤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유입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게 되는데, 그래도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서울에 많을 것이라 여기고 모여든 것이었다. 청계천변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판자촌이 세워졌다. 1960년대에 들어 정부는 도심의 판자촌 주민을 서울 변두리로 밀어내었다. 그중 하나가 관악산 북쪽 사면인 신림동·봉천동·난곡동 일대였다. 달동네라는 이름도 이즈음에 생겼다.

신림시장이 있던 신림 사거리는 이 달동네 주민이 밖으로 나다니는 길목 중 하나였다. 관악산에서 내려오는 도림천변을 따라 내려오면 신림 사거리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왼쪽으로는 구로공단이 있고 오른쪽으로 낙성대 고개를 넘어 사당에 이르고 곧 강남에 닿게 된다. 1970년대 구로공단은 ‘수출역군’이, 삽질이 한창이던 강남에서는 ‘노가다’가 필요했다.


달동네 주민은 아침이면 신림 사거리까지 나와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흩어져 일을 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신림 사거리를 거쳐 달동네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신림 사거리는 달동네 주민에게 예전 농촌에서 살 때의 읍내 비슷한 공간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1990년대 초까지 신림 사거리에는 큰 규모의 읍 소재지에 있음직한 허름한 극장도 있었고 색싯집 골목도 있었고 야바위꾼도 있었고 술주정뱅이도 있었다. 또 달동네에 사는 청년은 방위가 되어 밤에는 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순대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순대 대중화’와 함께 등장한 신림동 순대

순대가 서민 음식의 상징이 된 것은 한국 양돈산업이 제법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서의 일이다. 돼지를 많이 키워봤자 서민에게 돼지고기는 여전히 귀한 것이었고 내장에 피와 당면, 채소 따위를 넣고 찐 순대를 먹었다.

시골의 재래시장에 가면 반드시 있는 것이 이 순대인데, 순대 없는 재래시장은 재래시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순대를 두고 어떤 특정 지역에서 예부터 유명하다 홍보하는 것은 바른 일이 아니다. 순대는 대한민국 모든 서민의 음식인 것이다. 신림시장, 그러니까 신림동·봉천동·난곡동의 달동네 주민들이 읍내라고 여겼을 법한 그 공간의 시장에 순대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신림시장에 ‘철판에 순대와 채소를 볶은 음식’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국에서의 순대 대중화가 시작된 딱 그 지점이다. 신림동 순대의 조리법은 원조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굳이 알 필요도 없다. 철판에 순대와 채소를 함께 넣고 볶는 음식은 신림시장 외에도 서울의 여느 시장 골목에서 흔히 보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 신림시장의 순대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 규모가 상당해 어떤 특별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신림동 순대 타운은 옛 신림시장 자리의 두 건물에 들어가 있다. 몇 개의 층을 통째로 순대 가게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칸막이 없이 여러 가게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다. 시장에 좌판을 벌여놓은 듯한 구조이다. 각각의 가게는 천장에 매단 간판으로 구별된다. 가게 이름이 온통 전라도 지명이다.


ⓒ황교익 제공신림동 순대 타운의 간판 이름은 온통 전라도 지명이다. 전라도 출신이 아니어도 여기서 순대를 먹을 때는 “나도 전라도다”라고 해야 이 순대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라도는 농업 지역이다. 한국 근대화에서 괄호를 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반도의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었고, 따라서 서울 유입 인구 중에 전라도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신림시장을 중심으로 한 달동네에 전라도 인구가 당연히 많았을 것이다. 전라도 사람이 많으니 전라도 지명의 간판을 달아 손님을 끌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쉬운 해석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경상도·충청도·강원도·경기도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전라도 음식일 것도 없는 저 순대를 팔면서 굳이 전라도 지명을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한강의 기적이라며 서울이 번창한 이면에는 빈부의 격차라는 어둠이 있다. 그 어둠에 또 한 겹 어둠이 포개져 까마득한 암흑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빈부의 차에 겹쳐진 지역 간 차별 때문이다. 그 어둠은 벗어날 수 없는 천부의 것이라 여기고 좌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에 해결될 수 없는 좌절이면 그 좌절끼리 모여 위무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좌절이 끝나기를 희망하며. 머리 위에 달려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고향 이름이 어둠의 근원이 아니라 지역적 자부심을 부여하는 이름으로 밝게 빛나는 것을 느끼며. 그러니, 그 이름 아래에서 먹는 순대에 어찌 맛을 따지겠는가. 서로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순대로라도 번창해야 하지 않겠는가.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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