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혼나는 게 생활이 될 만큼 우리는 특별히 타락했거나 특별히 나태했거나 특별히 어리석은가? 그럴 리가. 부모들이 그렇게나 많은 보약과 영양제를 먹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사교육의 세례를 흠뻑 받도록 키워낸, 하루 15시간의 야간자율학습을 견뎌내고 대학까지 통과해낸, 지금도 새벽같이 일어나 수험서를 끌어안고 학원가와 도서관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가는 이 세대가 지금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온 그 모든 세대 중 유독 어리석고 나태할 리는 없다. 모든 세대는 그 세대 나름의 불행을 짊어지기 마련이다. 일제 시대를 겪어낸 20대는 어떠한가? 6·25를 겪어낸 20대는 또 어떤가? 군사정권을 겪어낸 20대는? 그들은 대단히 행복했나?
모든 젊음은 나름의 고유한 불행을 딛고 어른이 된다. 그 불행은 겪어내고 난 뒤에는 훈장으로 변모한다. 사람은 밥도 먹고 살지만 생색을 먹고 살기도 한다. 고상한 말로 하면 자부심이 될 것이다. ‘내가 일제 시대에 말이다’ ‘내가 6·25 때 어땠는지 아니’ ‘니들이 군사정권에서의 삶을 아니?’ 민족의 고통을 겪어낸 개인은 생색으로 그것을 증거한다. 그리하여 개인은 역사의 증거자가 되고 생색은 그가 헛되게 살지 않았다는 증거로 기능한다. 지금 20대의 가장 큰 불행은, 생색낼 거리가 없는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싸울 대상이 없는 시대, 다만 물신의 시대, 무너뜨리려 해도 형체 없이 다시 일어나서 덤비는 모래와 싸워야 하는 시대, 무언가 소리 내어 외치면 촌스러워 보인다고 ‘쿨(cool)’이 손가락질하며 끊임없이 청춘의 뜨거운 체온을 얼리려 드는 시대, 안개와 싸워야 하므로 헛발질만 하다가 제풀에 넘어지는 세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청춘이 있을까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대로라면 우리는 ‘내 청춘? 청춘을 유예하고 가사 상태로 살았지.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를 어른들이 넌 그딴 정신 상태라면 곧 굶어죽을 거라며 겁주는 대로 놀란 토끼처럼 지냈어. ‘안전빵’ 직업을 가지려고 젊음의 태반을 책상 앞에서 보냈고 일단 남들 하는 거 해보려고 온 힘을 다했지’라고밖에 대답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어렴풋이 느끼는 점은 다만 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것, 시시때때로 우리를 갉아먹을 허무감과 맞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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