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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아 세상이 '깜박'한 존재들

박민규·윤성희·백가흠·김애란 같은 작가들은 20, 30대들이 처한 다양한 계급성의 징후들을 포착한다. 청년 실업의 만성화는 이제 모든 세대가 공유하는 화두이다.

정여울(문학평론가) 2007년 10월 01일 월요일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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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미 제공
김중혁은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빚어낸다. 시종일관 웃기고 막판에 독자를 울리는 김중혁식 코미디는 근래에 보기 드문 채플린식 감수성의 탄생이다.
 
   
일본 소설의 대공세와 역사 소설의 축제 분위기. 그 속에서 정작 소외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이다. 박민규, 이기호, 윤성희, 백가흠, 김중혁, 김애란 같은 젊은 작가들은 우리 사회의 20, 30대들이 처한 다양한 계급성의 징후들을 포착한다. 그들에게는 이 ‘88만원 세대’가 또렷이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너무나 눈에 띄지 않아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박민규, <핑퐁>)로 비친다. 그들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불리기보다는 다양한 자기비하적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편안히 여긴다. 

박민규의 <핑퐁>에서 주인공 왕따 소년은 ‘못’이라 불린다. 하도 여기저기서 얻어맞고 다닌 탓에 두개골에 금이 간 이 소년은 자신이 ‘망치에 대가리를 얻어맞을 운명’으로 태어난 ‘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저 ‘못’이라 불리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본명을 알 수 없이 그저 ‘못’일 뿐이다. 이기호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에서 그려내는 이 사회의 ‘루저’들은 아예 ‘시봉’이라는, 살짝 헐거운 욕설을 연상시키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린다. 자칫 우울과 무기력의 늪으로 빠지기 쉬운 캐릭터들을 애잔한 유머로 다독이는 이 작가들의 시선은 따뜻하지만 이정표가 없다. 섣불리 희망을 말하기엔, 그들을 둘러싼 현실의 장벽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다. 뚜렷한 직장도 든든한 가족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정체성을 묶는 유일한 징표는 지독한 ‘머피의 법칙’ 뿐이다.

한편 윤성희는 최근 소설집 <감기>에서 애면글면 일상을 꾸려나가는 현대인의 삶을 나직한 희망의 연가로 음미하고 있다. 하나같이 ‘별 볼일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세상 속으로 불러내는 그녀의 목소리는 가사 없는 허밍의 나직한 읊조림을 닮았다. 평론가 김형중은 윤성희의 <감기>를 일컬어 “별자리 그리기를 포기한 천문학자의 눈에 비친 은하수의 아름다움”이라 칭했다. 눈에 띄는 거성들의 자취를 따라 그린 메이저 별자리가 아니라, 너무 작아 식별할 수 없는 별들, 궤도를 이탈하여 추락하는 별들을 정성스레 모아 그린 새로운 마이너 별자리. 이 길 잃은 작은 별들이 구축한 세계가 윤성희가 그려낸 ‘과소 인간들의 연대’라고 말이다. 윤성희는 청년실업 세대를 따로 떼어내 형상화하기보다는 그들이 무엇보다도 우리 가족이고 친구이고 연인임을 묵묵히 긍정한다. 그녀가 그려낸 마이너리티의 별자리 속에서 이들은 ‘희망을 잃어 초라한 인간’이 아니라 ‘된장녀나 보보스족은 결코 알 수 없는 희망의 냄새를 맡는 자’들로 승화된다.

한편 88만원 세대 자체의 소외된 계급성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작가는 김애란이다. 그녀는 <달려라, 아비>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원으로 버티는 백수 청년의 삶(<종이물고기>)을 그리고, 편의점만이 이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에 편입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 20대 여성의 삶(<나는 편의점에 간다>)을 담아낸다. '노크하지 않는 집'에서는 저마다 똑같은 방문 안에 갇혀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원룸 세대의 고독과 공포를 그려내며, <성탄특선>에서는 모두들 흥청망청 소비의 축제로 탕진하는 크리스마스가 오히려 가혹한 재앙으로 느껴지는 가난한 오누이의 삶을 짚어낸다.

신종족 출현에 호들갑 떨지 마라

한편 김중혁은 <유리방패>에서 백수 청년들의 요절복통 취업 실패기를 그려냄으로써, 그 어떤 탈출구도 찾을 수 없는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한 편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빚어낸다. 시종일관 무지하게 웃기고 막판에 독자를 울리는, 이렇게 슬픈 김중혁식 코미디는 근래 보기 드문 채플린 식 감수성의 탄생이다. 이제 ‘이태백·이구백’ 세대들에게 실업은 ‘상황’이나 ‘환경’을 넘어 ‘세포’나 ‘무의식’처럼 너무 깊이 각인된, 존재의 토양이 되어버렸다. 김중혁의 소설 제목처럼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존재들은 ‘무용지물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어, 그 고통마저 상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88만원 세대의 삶이 단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는 점을 가장 격렬한 아우라로 보여주고 있는 작가는 백가흠이다. 백가흠은 소설계의 김기덕이다. 그는 관객을 최대한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영화란 단지 미학적 대상이 아니라 충격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김기덕과 닮았다. 백가흠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참혹한 타인의 고통을 전혀 다듬지 않은 야생의 상태로 독자 앞에 내동댕이친다. 그와 김기덕의 차이가 있다면, 백가흠 쪽이 훨씬 따스한 유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김기덕이 타인의 고통 자체를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아 그 고통이라는 무기로 관객의 심장을 찌른다면, 백가흠은 다소 헐렁한 ‘척’하는 페인트 모션으로 독자를 웃긴다. 막상 웃어놓고 나니 그들의 고통이 너무 선연하여 그제서야 코끝이 시리다. 백가흠은 배고픔과 비참함을 잔혹한 섹슈얼리티나 가학적 린치로 해결하는 ‘망가진’ 인간들의 군상을 보여주면서 결코 작가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88만원 세대조차 되지 못하는 처참한 환경에 처해 있는 주인공들이, 그저 먹고 마시고 떠들고 울고 섹스하게 내버려두는 것. 그럼으로써 백가흠은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히 치명적으로 뒤틀린 계급모순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제는 좀처럼 ‘백수’라는 고전적 표현은 쓰이지 않는다. 청년실업의 징후는 단지 ‘88만원 세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십장생(십대도 장차 백수가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삼팔선(38세 정년),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남으면 도둑) 따위 서슬 퍼런 신조어들. 청년실업의 장기화, 만성화는 이제 모든 세대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화두가 되었다. 한편 캥거루족, 부메랑족, 프리터족, 니트족, 나홀로족, 코쿤족 등의 다양한 ‘종족’의 분포도 또한 청년실업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증거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종족의 출연에 호들갑을 떠는 태도야말로 88만원 세대를 타자화하는 지름길이 아닐까. 지나치게 날카로운 경계를 그어 그들이 지닌 다양한 ‘탈중심성’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이 사회라는 거대한 무대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문화 전략이 아닐까. 사실 그들은 (청년실업 세대 중에서도 가장 ‘노땅’에 가까운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의 남동생이고 누이들이고 후배들일 뿐이다. 그들은 사회에 발 딛는 순간 자신을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사회의 맨얼굴을 목도하고야 만다. 이들의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시시콜콜 구별짓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아프게 환기하는 우리 사회의 ‘계급성’을 은폐시키는 전략이 아닐까. 호연지기와 객기를 아무리 부려도 모자랄, 인생에서 가장 팔팔한 원기를 자랑해야 할 세대들. 그들을 ‘88만원 세대’라는 초라한 닉네임으로 가둬두는 이 사회야말로 진정 만천하에 ‘소환’되어 심문받아야 마땅한 존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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