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칭하이성(靑海省). 티베트 동북부 지역으로 전에는 ‘티베트 암도’라 했다. 티베트에서 분리된 후 칭하이 호수 때문에 칭하이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이름만큼이나 푸르다. 호수도 푸르고 하늘과 땅도 푸르다. 그 푸른 지평선을 들여다보면 저 멀리 유목민의 양과 야크들이 노닌다. 중국에서도 가장 인구밀도가 낮고 특별한 산업시설이 없는 이곳은 그 이름만큼이나 대개의 사람에게 낯설다. 그곳을 갔다. 오직 자연과 그에 순응하는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멀어 보였다. 하루 300㎞ 이상, 고지대를 넘나들며 10시간씩 이동했다.

 

 

 

해발 4000m 샹피산 정상. 화려한 ‘탈초’(경전을 적은 깃발)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들어온다.

 


제주도보다 더 큰 칭하이 호수

중국 칭하이성 성도 시닝(西寧)에 도착해 차를 얻어 타고 칭하이 호수 동북변을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바이칼 호수도 그렇지만 이 호수 역시 바다다. 아주 오래전 바다가 융기해 만들어진 염호(鹽湖)이니 더욱 그렇다. 얼마나 큰지는 면적과 저수량으로 가늠할 수 없다. 다만 그 둘레가 360㎞ 정도 된다. 제주도가 이 호수에 퐁당 빠진다. 특히 호수의 일주도로가 잘되어 있어 중국 전역에서 자전거를 타러 온다. 국제적인 자전거 대회가 있을 때에는 차량이 통제되고 칭하이성 일대 숙박시설은 동이 난다고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관광객 하나 없던 이곳으로 이제 여름 휴가철 피서객이 몰려든다. 평균 해발고도가 3000m가 넘어 한여름에도 20℃ 정도에 머문다.

칭하이 호수 동부에서 치롄산(祁連山)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유채꽃밭인 ‘백리화해’를 지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서쪽으로 달렸다. 칭하이 호수변 109번 국도를 따라 샹피산(橡皮山) 정상 부근에 도달했을 때는 고도계가 4000m를 넘어선다. 숨은 가쁘고 머리는 조여온다. 고산증이다. 별다른 약이 없으므로 그저 참거나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요즘 여행자들은 고산병 특효약으로 ‘비아그라’를 챙기곤 한다.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니 괜한 소리는 아니다. 

 

 

 

 

 

 

칭하이 호수 주변에 화려하게 핀 유채꽃.

 


이곳에서 우연하게도 야외 법회를 만났다. 현 달라이라마인 톈진 갸초의 고향 탁처에서 가까운 황허 강변의 하종사 스님들이 먼 이곳까지 유목민들의 요청으로 법회를 열기 위해 왔다고 한다. 당연히 겔룩파(格魯派:달라이라마가 이끄는 종파로 티베트 불교 종파 중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스님들로, 달라이라마를 수장으로 여긴다. 반경 수십㎞ 안에 있는 유목민들은 저마다 자동차를 이용하거나 말을 타고 샹피산 공터로 모인다. 결혼 등 경조사를 제외하면 이 법회가 연중 가장 큰 행사다. 근처에 절이 없는 망망한 초원에서 홀로 수행하는 티베트인 신자들이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내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달라이라마의 고향이 될 것이다.

다시 차를 달려 칭하이 호수를 끼고 남쪽으로 향한다. 우리 앞에는 도당하(倒撞河)가 흐른다. 칭하이성이 역사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둘. 첫 번째는 서기 641년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현 시안)을 출발한 당태종의 딸 문성 공주는 토번(현 티베트) 국경 앞을 흐르는 도당하 앞에 선다. ‘거꾸로 흐르는 강’이라는 뜻의 이 강 앞에서 문성 공주는 서쪽으로 물길을 바꿔 흐르는 도당하를 보고 당나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고쳐먹고 라싸에서 마중을 나온 토번의 왕 송첸캄포와 함께 길을 떠난다. 그 길을 ‘당번고도’라 하는데, 지금은 칭짱 국도와 기차선로가 지난다. 중국이 이야기하는 티베트의 한화(漢化)는 바로 그 길 때문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1642년 칭하이 호수변에서 벌어진 역사적인 회담이다. 몽골 알탄 칸의 초청을 받은 활불(活佛: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소남 갸초가 티베트 불교의 포교와 군사적 보호를 교환한 사건이다. 이때 알탄 칸은 갸초에게 ‘달라이라마’라는 이름을 선사하는데, 그 뜻이 ‘바다 같은 스승’이다. 

 

 

 

 

 

 

얼마나 오체투지를 해야 마룻바닥이 이처럼 닳을까. 티베트인의 신앙심을 외부자가 쉬이 이해하기는 어려우리라.

 


손수레 끌고 3000㎞를 오체투지하는 청년

문성 공주가 지났던 일월산을 넘어 지도에도 없는 도로를 따라 납척산을 넘는다. 고도는 다시 4000m를 넘어서고 있다. 산 정상에서 손수레에 잔뜩 짐을 싣고 가는 28세의 톈진 장초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달라이라마의 고향에서 가까운 퉁런(同仁) 출신으로 3년6개월 일정으로 라싸까지 오체투지로 간다고 한다. 하루 5㎞씩 이동하는데, 손수레를 끌고 먼저 5㎞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오체투지하며 가는 식이다. 그가 가야 할 길이 3000㎞가 넘으니 실제로는 1만㎞를 가야 한다. 눈물 난다. 무엇이 이 청년에게 그런 고행을 감내하게 하는 것일까? 인민 무지(無知)라는 티베트 불교의 악습에 생각이 미치다가도 이 청년의 해맑은 모습에 말문을 닫는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을 비난할 순 없다. 

 

 

 

 

 

 

퉁런의 룽우쓰 본당에서 마주친 달라이라마의 사진. 금지된 상징이 버젓이 놓여 있어 순간 당혹스러웠다.

 


톈진 장초와 헤어지고, 납척산을 넘어 도착한 구이더(歸德)에서 만난 것은 눈이 부시도록 푸른 황허(黃河)였다. 칭하이성에서 발원해 쓰촨성(四川省)과 간쑤성(甘肅省)을 휘돌아 다시 칭하이로 돌아온 황허는 자연의 강 본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 달라이라마인 톈진 갸초는 아마도 이렇게 푸른 황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939년, 이 지역의 작은 촌인 탁처에서 살던 다섯 살 아이 라모 톤둡은 라싸로 가서 톈진 갸초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동네 티베트인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올해가 인민해방군에 의한 티베트 지역 점령(또는 해방) 60주년이다. 시진핑 중국 부주석은 60주년 행사장에서 “달라이라마 식 분리주의에 맞서 결연히 싸우자”라고 했다. 2만명이 운집한 포탈라궁 앞 광장에서 진행된 이 행사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배타적 권리에 어떠한 양보도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사태가 이러니 티베트 전 지역에서 달라이라마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고향에서 가장 큰 사찰이라 할 수 있는 룽우쓰(隆寺)에서 충격을 받았다. 사찰로 인해 현급(縣級) 도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퉁런의 룽우쓰는 중국 전역에서 ‘만다라’ 불화가 가장 유명한 사찰이다. 이곳의 사원들을 돌아보다가 불전 앞에 당당하게 내걸린 달라이라마 사진이 놀라웠다. 2009년, 승려 95명이 체포된 폭동 사건 이후에도 이 지역은 숨죽이고 있었을 뿐 그 내부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부정하지만 여전히 티베트와 칭하이성 일대는 달라이라마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매일 300㎞ 이상을 달려도 칭하이성의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었다. 자치구를 제외하고 모든 성에서 가장 크고 가장 못사는 동네가 칭하이성이다. 그래서 개발되지 못하고, 그래서 자연과 함께 사는 이들이, 땅과 물·하늘이, 눈물 나게 푸른 곳이 칭하이성이었다. 그래서 티베트 짱족자치구와 다른, 푸른 티베트 칭하이를 알려주고 싶었다.

 

 

 

 

 

 

화려한 티베트 불교 사원의 단청(위). 티베트의 단청은 고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자명 칭하이성/글·사진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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