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떤 회사의 사장인데 매달 은행에서 10억원을 빌렸다 갚았다 하면서 운영해왔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순간 10억원 정도로는 회사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은행에 매달 4억원씩을 더 빌려달라고 한다. 은행 처지에서 보면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추가 대출을 원하는 한심한 회사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도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은행이 매달 4억원씩 순순히 더 빌려 줄까? 아마 당신 회사는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할 것이고 신용등급이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


디폴트 면했으나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

이는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다만 궁지에 몰린 ‘돈 빌리는 자’는 일개 회사가 아니라 미국 정부다. 원래 미국 정부는 14조3000억 달러(=정부 부채 상한)까지만 돈을 빌릴 수 있게 법률로 정해져 있었다. 오바마 현 대통령 집권 이전까지 미국 정부의 부채는 이미 12조 달러 규모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금융위기 수습 차원에서 경기 부양, 소외층 지원 등을 위해 2조4000억 달러 정도를 더 빌려야 했고, 이에 따라 미국 정부의 부채는 그 법률적 상한선에 거의 접근하게 되었다. 이에 오바마 행정부는 법률적 부채 상한선을 2조 달러 정도 늘려달라고 의회에 제안했고, 공화당과 ‘치킨게임’을 벌이다 법률 시한인 8월2일에야 타결 짓기에 이른 것이다.


ⓒAP Photo다우존스 지수가 급락한 8월4일, 뉴욕증권거래소 트레이더들이 증시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이날 민주·공화당 협상이 타결되지 않았다면, 미국 정부는 결국 빌린 돈의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는 ‘디폴트’로 몰렸을 것이다. 현재 미국 정부의 지출 중 40%는 빌려서 충당하는 몫이다. 그런데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자에게 누가 돈을 빌려 주겠는가. 그러니 디폴트 상황으로 갔다면, 미국의 정부 지출 중 40%(미국 GDP의 10%쯤 된다)가 한순간에 증발되고 이에 따른 대혼란이 불가피했다. 미국 정부는 국내외 기업과의 계약, 정부 고용인력의 임금, 연금·실업 등 복지급여를 지급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미국에 수조 달러를 빌려준(수조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산) 해외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주지 못해 국제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을 것이다(아래 그림 참조). 증권시장이 공황 상태에 들어가고(다우존스 지수가 50% 하락했을 것이라는 추정까지 있다), 신용체계가 마비되면서 폐업이 줄을 이었을 것이다. 한국 등 수출 중심 경제는 미국의 소비가 크게 줄어들면서 갑작스러운 불황기를 맞는 것이 불가피했다.

민주·공화당의 8월2일 협상 타결로 미국은 일단 디폴트 위기를 면했다. 그런데도 미국 경기의 하락이 확실해지고 남유럽 재정위기까지 겹치면서 세계 증시가 출렁이고 있다. ‘금융시장 대폭락’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최근 발표된 미국의 경제 실적(고용률·제조업 가동률)이 실망스러웠던 탓도 크다. 그러나 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그동안 세계경제를 떠받쳐온 미국의 금융제도들이 해체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공화당의 정부 부채 상한액 협상이 삐걱거리던 지난 4월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국가 신용등급에 대한 ‘부정적 전망’을 발표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S&P의 발표는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우량(AAA)으로 유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S&P는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할 가능성이 50%라고 공언하고 있다. 무디스·피치 등 다른 신용평가사들은 협상 타결일인 8월2일 미국 신용등급을 일단 최우량으로 유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정적 전망’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국내외에서 돈을 빌리는 방법은 국채 발행이다. 이른바 재무부 채권(T-Bond, T-Bill). 그런데 미국 국채는 ‘무위험(risk-free) 증권’이라 불린다. 사실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적인 용어다. 주식·채권·옵션·선물 등 증권의 본질은 가격이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있다는 것, 즉 ‘위험성’(risk)이기 때문이다. 미국 이외 나라의 국채 역시 이런 위험성을 가진 증권이다. 재무부 채권이 무위험 증권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발행자(돈을 빌리는 자)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금과 이자를 상환 못할 위험이 없다고 간주되는 것. 더욱이 미국 정부는 기축통화인 달러까지 발행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재무부 채권은 사두기만 하면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무위험 증권인 것이다. 금리도 매우 낮다. 장기에 속하는 10년물 국채 금리가 3% 정도. 그런데 미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진다는 것은 재무부 채권의 신용등급이 떨어진다는 것과 같다. 지구 유일의 무위험 자산이 위험 자산으로 전환되는 사태다.

이에 따라 ‘돈 빌리는 비용’(금리)이 지구적 차원에서 폭등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신용등급 하락은 미국 정부가 돈을 빌릴 때 더 많은 이자를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모든 증권과 대출은, 미국 국채보다 덜 안전하고 이에 따라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 즉, 미국 국채 금리의 상승은 다른 금리를 더 높이게 되고, 이는 기업 투자와 가계 소비를 압박하게 될 것이다. 실업률 증가도 불가피하다. 더욱이 미국 정부는 국채 금리의 상승에 따라 더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달러를 더 인쇄해서 뿌릴 수밖에 없다. 이는 물가상승과 달러 가치 절하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다. 한국 등 수출국은 달러 환율 하락에 따라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불황을 맞게 될 것이다.


미국 신용등급 하락은 세계 경제의 악몽

그러나 이는 그나마 가장 행복한 시나리오다. 미국(국채)의 신용등급 하락은 세계 금융질서를 뿌리째 흔들 핵폭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금융기관이 금융기관으로 존속하고 금융거래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엔 위험이 없다’는 시장의 믿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느 나라나 금융기관에 적용되는 기본적 규제 중 하나는 충분한 ‘지불 능력’의 유지다. 금융이란 기본적으로 남의 돈을 빌려 운용해서 그 수익금을 얻는 산업이다. 그런데 운용에 실패해서 손실을 내면 빌린 돈도 못 갚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산업국가의 정부는 금융기관이 손실을 볼 가능성과 규모를 예측해서 이에 상당하는 지불 능력을 갖추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은 이 지불 능력을 주로 증권으로 보유한다. 이 증권은 가급적 ‘안전한(가치 변동이 없는)’ 증권이어야 한다. 예컨대 자본금 10억원을 가진 금융기관이 90억원을 빌려 주식에 투자했다고 치자. 이 경우, 주가가 10%만 떨어지면 자본금(10억원)이 잠식되고 금융기관의 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서 금융기관들은 미국 국채를 보유한다. 비록 수익률은 낮지만 가치가 안전하게 보전되는 ‘무위험 증권’이기 때문이다.


ⓒEPA대표적 신용평가사인 S&P는 지난 4월 미국의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을 발표했다. 위는 미국 뉴욕의 S&P 사무실.

더욱이 국채는 금융기관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담보이기도 하다. 예컨대 금융기관들은 상호 간에 하루 만기로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빌리고 빌려준다(오버나이트 시장). 그런데 이런 큰돈을 일상으로 주고받는 데는 상당히 안정적인 담보가 필요하다. 하루 단위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거래에 일일이 새로운 계약을 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주로 사용되는 담보가 바로 미국 국채다. 시세가 하루에도 수차례 변동하는 다른 증권을 담보로 받았다가는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은행이 기업으로부터 단기 자금을 빌리는 레포(RP) 시장에서도 미국 국채가 가장 중요한 담보다.

또한 금융기관들은 파생상품 등의 거래에서도 미국 국채를 담보로 사용한다. 이런 거래에서는 계약액의 일부만 ‘증거금’으로 내걸어도 된다. 증거금으로는 미국 국채 외에도 다양한 증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국채는 시세가 그대로 반영되는 반면 다른 증권들은 시세 중 일부만 인정된다. 일반 기업 주식의 경우, 시세가 100만원이라 해도 예컨대 70만원 정도로만 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를 ‘헤어컷’(haircut) 제도라고 한다. 미국 국채와 달리 일반 주식은 가치가 변동하므로 시세 중 일정 비율(예컨대 30%)을 빼고 증거금으로 인정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파생상품 거래를 위해서라도 미국 국채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이피모건체이스의 최근 추정에 따르면 무려 4조 달러 정도의 국채가 오버나이트·레포·옵션 따위 거래 담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미국 국채의 이런 기능이 해체될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공화당 간 협상이 지지부진하던 지난 7월29일 시카고 상품거래소가 미국 국채 담보에 적용되는 헤어컷을 올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 국채는 더 이상 무위험 자산이 아닌 것이다.

미국 국채의 담보 능력이 떨어져버린 세계는 어떻게 돌아갈까? 금융기관들은 오버나이트 시장과 파생상품 거래에서 더 많은 담보를 제공하고, 이는 만만치 않은 부담을 추가로 안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담보를 채워넣지 못해 깡통을 차는 금융기관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더욱이 충분한 지불 능력을 유지해야 하는 금융기관 처지에서, 미국 국채가 더 이상 무위험 자산이 아니라는 사실은 존속에 관련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미국 국채 폭락과 금융 부실의 악순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보유하고 있는 증권을 내다팔아 부채를 갚아야 한다(디레버리징). 이에 더해 대출이나 증권 투자 등의 영업도 크게 줄일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거대 금융기관이 엄청난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 중인 현실을 감안하면, ‘증권 팔기’는 지구적 차원에서 이뤄질 것이고 이는 금융시장 폭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은 대부분의 자산을 증권으로 보유하고 있으므로, 자산(증권) 가격 하락은 금융기관 부실화와 같은 의미다. 이에 따라 금융기관들은 부실화를 차단하기 위해 다시 증권을 팔아 부채를 갚고 이는 부실을 더 악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그동안 세계 금융시장을 떠받쳐온 미국 국채의 지위 하락에서 비롯된 사태인 만큼 현 지구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 위기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신용평가사들이 미국의 신용등급을 낮춘다면 현실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행한 사태의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미국의 유력 컨설팅 기관인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폴 데일스는 8월 초 증권시장 전문 언론 〈마켓워치〉와의 인터뷰에서 “민주·공화당의 협상안은 미국의 재정 상태를 지속 가능한 궤도로 올려놓지 못했을 뿐 아니라 최우량 등급을 상실할 수 있는 상황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했다. 지금 가능한 유일한 질문은, S&P와 다른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 하락의) 방아쇠를 이번 주에 당기느냐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주느냐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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