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강남이 번쩍번쩍한 건물들 틈으로 속물의 서울내기를 불러모으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이었다. 사대문 밖 서울의 변두리에 살면서 “시내 나간다” 하면 광화문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종로·무교동·명동 따위의 동네에 마실 나가는 일을 뜻했다. 일거리가 그곳에 있었고, 그 일거리를 나눌 사람들이 거기에 모였다. 그 일거리 정보를 듣기 위해서도 이 광화문 네거리 근처로 와야 했다. 조선 건국 이래로 서울의 허브는 이 사대문 안이었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초토화했다.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일제가 남겨놓은 조그만 근대의 흔적들도 깨져나갔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는 그 상처를 계속 상기하게 하므로 애초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사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 뒤의 서울이, 애초 서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순식간에 채워졌다는 것이다. 예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 하여도 그 폐허를 가슴에 오래 담아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먹고살 일이 더 급했을 것이니.


ⓒ시사IN 윤무영피맛길 재개발로 인해 제일은행 본점 뒤 골목으로 이사한 열차집(오른쪽). 궁중음식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라 하고 피맛길의 그 오래된 빈대떡집은 ‘서울시 선정 자랑스러운 한국음식점’에도 끼이지 못한다.

1980년대에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외식산업의 팽창이 있기 전, 사대문 안의 식당들은 초라했다. 기껏해야 백반에 국밥·설렁탕·자장면을 팔았다. 대로변 가게에 식당을 차린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값비싼 메뉴를 걸어도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당들은 뒷골목에 진을 쳤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면 조그만 식당들이 닥지닥지 붙어 영업을 했다. 사대문 안에는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서울의 대로는 양반의 길이었고 이 좁은 골목은 아랫것들의 길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대문까지 종로대로를 따라 왼쪽으로 난 좁은 길인 피맛길이 그 대표적 골목이다. 피맛길은 ‘말을 피하는 길’이라는 뜻인데, 양반이 탄 말을 피한다는 뜻보다 양반을 말이라 여기고 이런 이름을 붙였을 수도 있다. 많은 양반들이 가마를 타고 다녔다.

사대문 안 뒷골목 식당들은 밥집 겸 술집이었다. 끼니 따로 먹고 술 따로 마실 여유가 없는 소비자를 상대해야 하니 이런 영업 형태는 당연한 일이었다. 국밥에 술국도 있고, 설렁탕에 뼈다귀찜이 있고 하는 식이었다. 이런 음식들 틈에 빈대떡이 있었다. 지금처럼 빈대떡을 전문으로 파는 식당은 없었다. 국밥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백반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족발도 있고 빈대떡도 있고 했다.

녹두가 흔한 한반도 전역에서 먹던 음식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서 부치는 전이다. 돼지기름으로 부친다. 돼지비계를 솥에 넣고 불 위에 올리면 맑은 기름이 나오는데, 이를 부어놓고 빈대떡을 부친다. 빈대떡은 한반도 전역에서 먹던 음식이다. 녹두가 흔했기 때문이다. 녹두는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특별히 가꾸지 않아도 된다. 야산 귀퉁이 자갈밭에 심어도 된다. 아무렇게나 두어도 잘 자라는 녹두는 조선 민중을 닮았다. 전봉준이 키가 작아 녹두장군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빈대떡의 어원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가장 흔한 게 빈대(賓待)떡, 즉 귀빈을 접대하는 떡이란 말에서 온 것이라는 설이고, 또 빈자(貧者)떡, 즉 가난한 자의 떡으로 빈자떡이라 하다가 빈대떡으로 바뀌었다는 설도 흔하다. 가장 근거 있는 것은, 옛 문헌에 ‘빙자’가 보이는데 이게 한자인 餠藷(병저:밀가루나 옥수수·수수 등을 갈아 납작하게 부친 떡)의 다른 표기이고 빙자→빈자→빈대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빈대가 이, 벼룩의 그 빈대이며 빈대 많은 동네에서 이를 즐겨 먹어 빈대떡이라 이름이 붙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설도 있다. 이 여러 설은 거의 말장난 수준일 뿐이다. 빈대떡이란 이름에서 더 흥미롭게 봐야 하는 것은 빈대‘떡’이다. 빈대‘전’이 아니라 빈대‘떡’이다.


ⓒ황교익 제공빈대떡에 막걸리 한잔(오른쪽). 서울의 빈대떡에는 굴과 조개를 섞어 담근 젓갈이 딸려 나온다. 빈대떡 위에 올려 먹는다.

떡의 분류에 ‘지지는 떡’이 있다. 부꾸미, 노티, 화전(진달래전·국화전), 총떡, 권전병, 주악, 산승 등이 그 떡에 들어간다. 주요 재료가 쌀, 찹쌀, 수수, 메밀 같은 곡물이니 그 반죽을 번철에 지져도 떡이라 분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지지는 떡에는 ‘떡’자가 잘 붙지 않는다. 화전은 아예 ‘전’이다. 빈대떡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채소와 고기 등을 넣고 지져내는 방법이나 모양새는 파전이나 김치전·고기전 따위처럼 전의 일종으로 보인다. 제사상에도 전으로 분류되며, 빈대떡집에서도 다른 여러 전과 함께 이 빈대떡을 전처럼 부친다. 빈대떡이 녹두전, 녹두빈대전, 빈대전 따위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다수 지역에서 대다수 사람이 빈대떡이라 한다.

조선에서도 녹두는 흔했고 따라서 빈대떡은 쉬 해먹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장시에서 빈대떡이 팔렸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빈대떡이라는 명칭은 1920년대 문헌에 흔히 등장하니 조선에서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이를 전이라 하지 않고 떡이라 한 것은 빈대떡을 끼니로 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예부터 떡은 밥과 같은 끼니의 음식으로 여기므로 녹두를 갈아 부친 것이라 해도 끼니의 음식이니 빈대떡이라 불렀을 것이란 생각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울 뒷골목에서는 끼니로서의 빈대떡이 팔렸을 것이고, 한국전쟁 이후로도 그랬을 것이다. 빈대떡에 대포 한잔의 끼니.

서울 사대문 안 골목골목에는 빈대떡 파는 집이 아직 많다. 피맛길이 재개발되어도 그 골목의 오랜 빈대떡집들은 다른 골목으로 자리를 옮겨 버티고 있다. 빈대떡집의 손님들은 빈대떡집만큼 나이가 들었다. 사대문 안이 진짜 서울이며 광화문 네거리가 아직 서울의 허브라 생각하는 ‘늙은’ 서울 사람들이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신다. 가게는 탁자를 조밀하게 놓아 서로의 말소리가 뒤섞여 소란스럽다. 고소한 돼지비계 냄새와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그 소란과 겹쳐져 잔칫집 같다. 이 늙은 서울 사람들은 고향집 잔칫날의 마당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이 고향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빈대떡의 가난이 낭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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