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22일:악몽 같은 주말의 시작

북위 59도 50분, 아름다운 피요르드와 숲으로 둘러싸인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휴가철이라 평소보다 한산한 금요일이었다. 그런데 오후 3시22분, 사람들의 귀가가 시작되던 무렵 발생한 폭발음이 길고도 잔인했던 악몽의 주말을 암시했다. 노르웨이 정부 청사 앞에서 폭발한 폭탄은 청사 1층을 파괴하고 총리실과 에너지부에는 큰 화재를, 주변 건물에는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정부 청사 근처에 있는 오슬로 소방본부의 유리창까지 집어삼켜 소방 출동을 지연시켰다. 폭발 5분 뒤 오슬로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구급 요청, 부상·사망 신고가 이어졌다. 오슬로 경찰은 추가 폭발을 우려하며 오슬로 전역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오후 3시58분, 총리 및 각료들의 안전이 확인되었다. 오슬로 경찰은 시민에게 시내 중심에서 대피할 것을 권고했다.

ⓒAP Photo폭발한 정부 청사 앞에서 부상자들이 응급조처를 받고 있다(위).

전에 없던 대혼란이 오슬로를 덮치고 있을 때, 오슬로에서 약 30㎞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우토야 섬에서는 노동당 청년 캠프가 진행 중이었다. 뭍에서 약 600m 떨어진 우토야 섬의 유일한 이동수단은 연락선이다. 오슬로에서 일어난 테러 소식을 듣고 걱정하던 캠프장의 청년들에게 승객 두 사람을 태운 연락선이 다가가고 있었다. 경찰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성과 우토야 섬의 관리 책임자이자 20년간 청소년 캠프를 운영하면서 ‘우토야 섬의 어머니’라고 불리던 모니카 보세이가 바로 그 승객이었다. 경찰복을 입은 남성은 오슬로의 테러 사건으로 우토야 섬의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고 보세이에게 이야기했지만, 보세이는 자세한 이야기를 회피하는 그 남성에게 의심을 품었다. 우토야 섬에 상륙하자마자 보세이가 섬의 담당 경비에게 그 경찰관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순간 첫 번째 총성이 울려퍼졌다. 연락선이 상륙한 지 30초 만이었다.

오후 5시27분, 경찰관 노드레 부스케루드는 우토야 섬에서 총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첫 번째 신고를 접수했다. 5시30분, 오슬로 경찰 본부는 우토야 섬 총격 사건에 대한 첫 번째 보고를 받았다. 5시38분, 오슬로 경찰 본부는 노드레 부스케루드로부터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 5시52분, 첫 번째 경찰 병력이 도착했으나 우토야 섬으로 진입하기 위해 배를 기다려야 했다. 오후 6시9분에 도착한 경찰 특공대 역시 배를 기다려야 했다. 6시25분, 마침내 경찰 병력이 우토야 섬에 상륙하고 2분 뒤 피의자인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를 체포했다. 7월22일 저녁부터 노르웨이의 모든 공중파 채널(NRK1, NRK2, TV2, TVN)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특별 뉴스를 방송했다. 노르웨이의 모든 미디어 채널을 통해 폭발 사건 현장, 파편에 의해 부상당한 피해자, 우토야 섬의 잔혹한 현장,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섬에서 헤엄쳐 나오는 사람들의 영상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AP Photo희생자를 추모하는 ‘장미 행진’.
 7월23일:일그러진 피의자의 신념

새벽 3시, 경찰 당국은 우토야 섬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최소 80명이라고 보도했다. 노르웨이 국민은 큰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이와 함께 피의자가 당초 예상과는 달리 노르웨이 사람으로 기독교 근본주의자이며 반이민·반이슬람을 주장하는 극우 민족주의자임이 밝혀지면서 노르웨이 사회는 더 큰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생존자들은 피의자가 경찰 복장을 한 채 매우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조준 사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노르웨이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는 국가적 비극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몽 같은 일이다”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사건이 노동당 청년 캠프에서 일어난 만큼 현 노동당 당수인 총리와 개인 친분이 있던 피해자도 여럿 있어서 그의 충격은 더욱 컸다.


폭발이 일어났던 오슬로 시내는 계엄령이 선포된 것 같았다. 왕궁과 국회의사당, 정부 청사를 중심으로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주둔해 추가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애썼다. 폭파 현장을 비롯한 주요 거리는 폐쇄되었고, 스산한 모습의 오슬로 중심가 칼 요한 거리에는 소수의 관광객만이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에는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꽃다발과 촛불이 놓이기 시작했다. 


피의자가 테러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1500쪽에 이르는 성명서와 그가 주로 활동했던 이슬람 비판 커뮤니티(document.no)에서 그가 작성한 글이 알려지며 이 잔혹한 행위의 배경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는 현재의 노르웨이와 유럽 정치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노르웨이 사회와 문화를 지키고 무슬림의 유입과 이슬람화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이 유럽과 노르웨이 사회를 구해야 한다고 믿는 전형적인 극우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테러 준비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는데, 자신은 유럽 전역에 퍼져 있는 이른바 ‘템플 기사단’의 일원이며 이번 테러 준비는 홀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전직 총리이자 WHO 사무총장으로 재임해 ‘노르웨이의 국모’라는 평가를 받는 그로 할렘 여사를 국가 살해범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그는 집권 노동당의 다문화 정책에 강한 적개심을 가졌다.


오후 8시, 노르웨이 국왕 하랄 5세는 이 사태와 관련한 성명을 발표하고, 희생자와 유가족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애도를 표했다. 나아가 국왕은 “공포보다 자유가 더 강력함을 믿습니다” “열린 노르웨이 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뢰” “우리의 땅에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하며 노르웨이 사회가 계속 지켜나가야 할 가치를 천명했다.


ⓒReuter=Newsis7월23일 구조대원들이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우토야 섬에서 부상자와 희생자의 시신을 찾고 있다.


   7월24일:비극을 극복해나갈 새로운 길


피의자가 전직 총리를 테러 목표로 삼았고, 오슬로 내에 폭탄 두 개를 더 준비했으며, 탄환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는 아찔한 사실이 새로 알려졌다. 노르웨이 국민은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11시, 오슬로 대성당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면서 왕실 가족과 총리를 비롯해 정부 관료와 유가족, 그리고 전국에서 수많은 국민이 모였다. 모두 한마음으로 이 비극을 슬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오늘 함께 슬픔을 달래고자 모였습니다.” “우리는 작은 나라이지만 자랑스러운 국민입니다.” “이와 같은 폭력에 우리는 더 큰 관용과 민주주의로 답하겠습니다.”


추가 테러 위험 속에서도 당당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스톨텐베르그 총리의 추도사는 노르웨이 국민에게 이 비극을 극복해나갈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추도 행사 내내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던 노쇠한 국왕 하랄 5세의 모습은 노르웨이 국민의 아픔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왕을 비롯해 노르웨이 주요 정치인들이 모인 추모 집회에는 그 흔한 가방 수색도, 금속 탐지기도 동원되지 않았다. 이심전심, 의심과 불안은 버려둔 채 애도의 마음과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한 꽃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오슬로 대성당 앞 광장은 한 송이 두 송이 시민의 마음을 담은 꽃으로 뒤덮였다. 하루 동안 10만명에 가까운 추도 인파가 오슬로 대성당을 방문해 애도를 표했다. 



ⓒReuter=Newsis테러 사건 이후 오슬로 시내는 무장 군인(위)이 주둔해 마치 계엄령이 선포된 듯하다.


   7월25일:“두 번 다시 7월22일은 안 됩니다” 


낮 12시, 노르웨이 정부는 정오부터 1분간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한 묵념을 제안했다. 짧지만 강렬한 1분의 침묵은 노르웨이가 겪은 큰 슬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오후 1시, 피의자 브레이비크가 구속적부심 심사를 위해 노르웨이 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르웨이 법정은 공개 재판이 원칙이지만 이 심사만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이 사건에 쏠린 전 세계의 관심, 보안상의 문제, 무엇보다도 이 법정이 피의자의 공개 발언대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반영해서였다. 피의자는 4주간 독방 구속을 포함해 8주간 구속되며 외부 접촉은 불허된다. 피의자는 심사 과정에서 이번 테러가 노르웨이 노동당을 벌하기 위해 벌인 일이며, 특히 청년 캠프를 노린 것은 노동당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나아가 폭탄 테러와 총격 사건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져 노르웨이 국민을 분노에 빠트렸다.


현재 노르웨이 형법상 테러 관련 행위로 기소되면 법정 최고형은 21년이다. 이는 그의 잔혹한 범죄에 비하면 너무 짧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법원에서 21년이 지난 뒤 법원 판단에 따라 범인을 계속 감호시설에 구속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지만 형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된다. 이에 노르웨이 사법 당국은 피의자를 테러 행위가 아닌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할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피의자는 최대 30년형을 받을 수 있다.


오후 7시, 사건 발생 3일째, 전국에서 애도 행렬이 시작되었다. 희생자를 애도하고 광기 어린 테러 행위에 굴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오슬로 시청 앞 광장에서 시작된 추도 행사에는 무려 20만 인파가 운집해, 인구 60만명인 오슬로 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운집한 행사로 기록됐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라면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오슬로 시민들은 손에 장미와 촛불을 들고 “Aldri mer 22. juli”(두 번 다시 7월22일은 안 됩니다)를 외쳤다. 너무 많은 인파가 모이는 바람에 예정되었던 애도 행진은 진행되지 못했지만 오히려 전 세계에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호콘 왕세자는 “오늘 저녁 거리는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잔혹함에는 친근함으로, 증오에는 화합으로 답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광기는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지언정 전 나라를 패배시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쳐 20만 추모객으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우리의 선조들이 ‘4월9일(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노르웨이를 침공한 날), 다시는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7월22일, 다시는 안 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라는 총리의 발언은 테러 이후 혼돈에 빠진 노르웨이 사회가 나아갈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더 큰 관용과 더 큰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다음 날인 7월26일, 경찰 당국은 1차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현재까지 오슬로 테러에서 사망자 8명, 부상자 30명이 발생했고, 우토야 섬에서는 사망자 68명 외에 부상자·실종자 66명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기자명 오슬로·정의성 (오슬로 대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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