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만에 국가권력의 불법 민간인 학살 범죄에 대해 사과하는 노무현 대통령.
“국민 대접받는 데 50년이 걸렸다.” 지난 1월24일 울산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추도식’에 참석한 김정호 유족회장(62)은 이렇게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행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58년 전 이 지역에서 자행된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를 하는 자리였다. 노 대통령이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전한 사과문 요지는 이렇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입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당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울러 이 기회를 빌려 지난날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과 유가족 여러분께 국가를 대신해 다시 한번 사과와 위로의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경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보도연맹이란 1948년 정부 수립을 마친 이승만 정부가 과거 일제하에서 좌익계 독립운동을 했거나 광복 뒤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던 모든 정당 사회단체 인사와 그 가족 지인 등을 ‘사상 개조’ 명분으로 가입시켰던 단체를 말한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거듭났다’고 추어올렸는데 이들은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 후퇴하던 군과 경찰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사건 뒤 정부는 이 사실을 철저히 은폐해왔으며 피해 유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오랜 기간 감시 사찰을 벌여 직업을 갖기 힘들게 하는 2중 피해를 입혔다.

보도연맹 사건이 공론화된 계기는 1990년대 초 〈시사IN〉(당시 〈시사저널〉)을 비롯한 몇몇 언론이 이 사건을 크게 발굴 보도하면서부터였다. 그 뒤 2005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거쳐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발족하면서 전국 각지의 보도연맹 집단 학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동시에 참여정부 들어 경찰청이 자체 설치한 내부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이 사건 관련 기록 등을 찾아내 국가권력의 불법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진상이 규명된 울산보도연맹 사건은 그 가운데 한 자락이다. 울산에서는 1950년 8월 군 경에 의해 이 지역 보도연맹원 등 407명이 집단 총살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해 11월27일 국가의 불법성에 관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가 피해 유족에게 사과하고 재정·행정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또 군과 경찰 등 공권력에 대해서는 자국민을 상대로 이런 불행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인권 교육을 철저히 하라고 권고했다. 노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화해 호소도 그래서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사과는 비단 울산 사건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불법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한 포괄적 사과의 성격을 띤다. 그는 진실을 밝혀 억울한 분들의 한을 풀고 명예를 회복해서 진정한 국민 화해를 이뤄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 이런 사건으로 훼손된 국가권력의 도덕성과 신뢰 회복도 주문했다.

공론화 과정 없이 폐지, 축소 쪽으로

전국 각지의 피해 유족은 너무 늦은 감은 있지만 국가를 대표한 노 대통령의 이번 사과와 화해 호소에 대해 ‘나라의 건강한 미래를 위해 다행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 아직도 유사한 사건 수십여 건이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 중이라는 점을 들어 조속히 진실을 밝히고, 진상이 규명된 사건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의 명예 회복, 추도 사업 등 후속 지원 조처가 따라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사과가 있었다고 해서 수십 년간 국가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려왔던 피해 유족의 염원이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과거사 정리 문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시선이 ‘삐딱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연초부터 현재 법에 따라 운영 중인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한나라당이 여당과 합의해 만든 각종 과거사 관련 특별법에 따라 설치된 위원회를 아무런 공론화 과정 없이 폐지 내지 축소 쪽으로 정리하겠다고 몰아붙이자 관련 시민·사회 단체는 물론 피해 유가족도 크게 반발했다. 1월17일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전국 피해자 유족과 범국민위원회 등 시민단체가 서울 삼청동 인수위 앞에서 과거사위 폐지 논의 철회를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들 단체는 물론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국회의원모임’(대표 강창일 통합신당 의원)에서도 새 정부의 과거사위원회 축소 방침에 항의해 1월25일 국회에서 반박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명박 인수위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 폐지 방침에 항의해 1월17일 인수위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하는 민간인 학살 피해 유가족.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1월21일 9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진실화해위 하나로 통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제주 4·3 사건, 노근리 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북파공작원 관련, 광주 5·18 관련, 민주화 보상 및 명예 회복 등에 관련된 위원회를 모두 폐지하고 모두 진실화해위원회로 통폐합하겠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인수위에서 관련 법을 검토하고 개정 작업을 거쳐 다른 법률안과 같이 당에 넘겼기 때문에 당으로서는 이제 법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부 부처 통폐합과 마찬가지로 과거사 관련 위원회 통폐합도 인수위에서 물밑 작업을 거쳐 강행 처리하는 행보를 보인다.

시민·사회 단체와 관련 피해자 등 이해 당사자는 이같은 인수위의 행보에 대해 ‘포위 고사작전’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가뜩이나 한나라당에서는 그동안 과거사 문제를 정쟁 차원으로만 들여다보며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이번에 나온 과거사 관련 기구 통폐합 법안도 사전 공청회나 여론 수렴 절차가 전혀 없이 나왔다. 결국 순수 인권 차원에서 과거사 관련 기구 정비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으면 새정부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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