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서울에 있는 한 서점에서 공무원 시험 관련 책을 살펴보는 취업 준비생.
“이명박이 보수예요?” 이틀째 눈이 쏟아지던 지난 1월22일, 서울 강남역 근처 한 영어학원에서 만난 대학생 지민경씨(24)는 놀란 얼굴로 이렇게 되물었다. 지난 대선 결과를 근거로 ‘20대의 보수화’를 논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소개하자 즉각 돌아온 반응이다. “나는 진보적인 편이고, 이명박을 찍을 때 보수 후보를 찍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명박식 진보를 기대한다.”

곧 취업을 해야 할 텐데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정책이 비정규직을 양산할 것이라는 걱정은 없을까. “비정규직은 구조적 문제고,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지씨의 대답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학생운동에 열정적이었고 2002년에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대학원생 김 아무개씨(29)도 이번에는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했다. 성향이 보수로 돌아선 것인지 물었다. “그건 아니다. 노무현 지지와 이명박 지지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명박 당선자 특유의 추진력과 업무 능력 또한 진보의 한 요소로 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육군 병장 민 아무개씨(22)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나라에서 뭔가 한 건 크게 해낼 듯한 사람이다”라고 이 후보를 지지한 까닭을 밝혔다.

보수 후보이기 때문에 이명박을 지지했다고 나서는 20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혹시 ‘보수’라는 딱지를 스스로 붙이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은 이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생 추 아무개씨(23)는 “보수 후보라는 인식이 없으니까 이명박 지지자들도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라고 짚었다. “2002년에는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던 20대가 거의 드러내기를 꺼렸는데 이번에는 다르다”라는 게 추씨의 회고다. “인수위가 내놓는 정책에서 거시적 고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강한 톤으로 비판하던 취업 준비생 임 아무개씨(26)조차 “이명박 당선자가 보수적이라는 이미지는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20대의 핵심 키워드는 ‘보수’가 아니라 ‘변화’다.” 올해 막 취직한 새내기 직장인 이 아무개씨(28)의 단언이다. 그 역시 2002년에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던 심정과 이번에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밝혔다.

이명박 지지와 노무현 지지는 닮은꼴

그렇다면 이들이 원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거칠게 쏟아지는 눈발 속에서 주유기를 들고 동분서주하던 주유소 직원 고 아무개씨(20)는 “경제를 살려주면 좋죠”라고,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고씨는 “나처럼 직접 돈을 버는 이들은 다 같은 심정일 것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기대를 드러냈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최 아무개씨(21) 또한 비슷한 생각이다. “경제가 좋아진다니까, 아무래도 기대를 많이 하게 된다.” 젊은 비정규직에게 이명박 정권은 다른 무엇보다 ‘일자리’를 뜻했다.

취업의 좁은 문을 갓 통과한 신입사원들은 특히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평가가 후했다. 신입사원 연수에서 한 조로 편성된 김태한씨(30) 등 네 명은 영화를 보러 나선 참이었다. 이들 넷 중 세 명이 이명박 당선자 지지를 밝혔다.

김씨는 “좌파 정권 10년간 활력이 너무 없었다. 새 정부가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더 심해지지는 않을지 의견을 묻자, “솔직히 말해, 내가 취업한 상황에서 내 일처럼 절실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라고 답했다. 김씨는 또 “그간 북한에 대해서도 너무 퍼주기로 일관한 면이 있다”라며 대북 정책의 변화도 주문했다. 그는 취재 과정에서 만난 40여 명의 20대 중 예외적으로 보수색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시사IN 윤무영서울 신림동 고시촌 주변의 한 당구장에서 취업 준비생이 당구를 치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부동산 컨설턴트로 일하는 윤일진씨(29)는 “부동산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경제를 잘 아니까 이명박 후보를 택했다”라고 밝혔다. 그 역시 2002년에는 노무현 지지자였고, 2007년 20대의 선택이 보수화라는 언론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았다.

취업 준비생은 이명박에게 회의적?

아직 취업문을 넘지 못한 이들의 생각은 어떨까. 취업 학원이 밀집한 노량진을 찾아가 봤다. 어느 공무원 준비학원 앞. 사람 대신 번호가 써진 종이들이 바닥에 깔려 길게 줄을 서 있다. 일종의 ‘번호표’인 셈인데, 3층 강의실에서 시작된 종이 행렬이 두 층을 내려와 건물 밖까지 이어져 있어 뜨거운 취업 열기를 짐작게 했다. 잠잠해졌지만 눈이 완전히 그치지 않은 야외 휴게실에서 수험생들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곳의 분위기는 다른 곳들과는 조금 달랐다.

“수업 듣느라 투표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는 김재영씨(29)는 지난 대선에 대한 질문을 받자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그렇게 답했다. “선거가 너무 재미없었다. 관심이 안 갔다”라는 게 김씨가 털어놓은 이유다. 마음에 두었던 후보를 묻자 ‘문국현’이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에서는 김씨 외에도 많은 사람이 지지 후보로 문국현을 이야기했다. 20대의 주된 욕망이 ‘변화’에 있다는 또 다른 증거로 읽을 만하다.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냉소적 반응도 들을 수 있었다. 경찰공무원을 지원하는 노정승씨(26)는 “하도 찍을 사람이 없으니, 1만원 주면 이명박 후보 찍겠다고 농담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강남역 앞에서 만난 대학생 김진일씨(26) 역시 “친구들끼리 중장비 자격증이나 따둘까, 농담도 한다”라고 전했다. ‘이명박식 경제 살리기’에 대한 회의감이 엿보였다.

이명박 당선자의 도덕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수생 이지연씨(20)는 “양심상 도저히 이명박 후보는 못 찍겠더라. 재수학원에서도 이명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전했다. 나이가 어리고 사회에 진출하지 않은 이들만의 감수성은 아니었다. 강남역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강성호씨(30) 역시 같은 생각이다.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야 좋지만, 그래도 이명박 후보는 좀…”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강씨는 “노점상끼리도 (이명박은) 되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이야기 많이 한다. 착한 사람이 경제를 살리면 좋지 않나”라고 웃으며 말했다.

‘보수적 사회 재편’ 승인한 것 아니다

지지자든 반대자든, 20대에게 이당선자는 보수 정치인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는 ‘추진력 있고 일을 잘해서’ 기존 정치권,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 확연히 대조되는 ‘새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서현정씨(24)는 “말 잘하고 일 못했던 노무현 정부를 겪다 보니, 말 못하는 이 당선자가 일은 잘할 것 같다”라며 참여정부를 비꼬았다. 노정승씨 역시, “내가 노씨지만, 노씨는 다시 대통령 하면 안 될 것 같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명박 당선자가 ‘변화’의 이미지를 선점한 데는 노무현 대통령의 ‘공’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당선자가 표방하는 ‘변화’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는 많은 지지자가 모호한 대답만을 내놓았다. 경제가 좋아질 것, 일은 잘할 것, 일자리가 생길 것 따위 막연한 기대 이상의 내용은 많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뒤집어 말하면, 이명박 당선자의 구상이 예고하는 보수적 사회 재편을 20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승인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공무원시험 준비생 신현섭씨(28)는 “퇴근해서 아들과 함께 개집을 만드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럴 수 있는 직업이 공무원밖에 없지 않으냐”라고 되물었다. 그런 삶이 공무원에게만 허락된 사회보다야, 직업에 관계없이 퇴근 후에 아들과 개집을 만들 수 있는 사회가 더 아름답지 않으냐고 했더니 신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디 신씨만의 생각일까.

기자명 천관율 수습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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