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의 죽음이다. 가난한 소년 네로는 평소 한번만 보기를 소원하던 루벤스의 그림 ‘그리스도의 강림’을 죽기 직전 간신히 본다. 두꺼운 커튼 뒤에 가려둔 진귀한 그림이라 볼 기회가 없었다.

김유승 중앙대 교수(문헌정보학)는 두꺼운 커튼 뒤의 루벤스 그림을 ‘고급 정보’에 빗댔다.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정보는 대개 힘 있는 권력자나 자본이 독차지해 커튼 뒤의 민낯을 보기 어렵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국가기관을 대상으로 정보공개 운동을 해오며 이를 실감했다.

권력자가 가치 있는 정보를 한사코 내놓지 않으려는 이유는 하나. 비윤리적이고 부패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라고 위키리크스 전 대변인 다니엘 돔샤이트 베르크(‘오픈리크스’ 운영자)는 말한다. 그가 발제자로 참석한 국제 행사가 7월6일 열렸다. 반부패네트워크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주최한 ‘위키리크스 사례를 통해 본 정보공개, 공익제보 운동의 발전방향’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시사IN 조우혜

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끔찍한 과잉 기밀의 세계에 살고 있다”(34~36쪽 인터뷰 기사 참조). 어쩌면 한국은 더하다. 기밀이 판칠수록, 정보공개가 불투명할수록 부패는 증식한다. 유원일 의원(창조한국당)에 따르면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2008년 5.6점을 기록한 이래 해마다 0.1점씩 하락하고 있다.


부패행위 신고, 한 해 평균 고작 146건

국민권익위원회 백서를 보면 2002~2010년 부패행위 신고 건수가 1315건이었다. 연간 평균 146건꼴이다. 최근 3년간 수치만 따지면 2008년 158건, 2009년 190건, 2010년 152건이었다. 이지문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부대표는 국가 규모에 비하면 신고 건수가 턱없이 낮은 수치라고 말했다. 최근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가 공무원 1006명에게 ‘공직사회 부정부패 정도’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26.6%가 매우 심각하거나 다소 심각하다고 답했다. 보통이라는 응답은 38.8%였고 심각하지 않다는 답변은 34.5%였다.

부패를 방지하고 정보공개를 보장하는 법·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패방지법이 제정된 지 올해로 10년이다. 2001년 6월 공직자와 공공기관의 부패 행위를 고발하고 내부 고발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이 제정된 뒤 부패방지위원회가 신설됐다. 앞서 1998년에는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이로써 공공기관을 합법적으로 감시할 길이 열렸다. 오는 9월이면 공익신고자보호법도 시행된다.

그러나 법·제도가 정비된 것과 달리 현실은 후퇴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반부패 활동을 전담하던 국가청렴위원회가 국민권익위원회로 통합되면서 위상이 실추됐다. 이재근 참여연대 시민감시팀장은 “현 정부 들어 기록 관리에 대한 인식도 후퇴했다. 심지어 청와대의 정보공개 담당자도 비공개다”라고 말했다. 무려 800만 건이라는 기록을 남긴 참여정부와 대조적이다.

전공노는 2008년부터 230개 기초단체 및 중앙부처를 상대로 공무원의 업무추진비 내역을 청구해왔다. 업무추진비는 비자금을 축적하는 용도로 악용되기 쉽다. 내역 부풀리기 등을 통해 조작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전공노는 관련 자료를 받는 데 애를 먹었다. 지자체마다 조례가 조금씩 달라서 공개하는 범위가 달랐다. 받은 정보도 정보로서의 질이 떨어지거나 허위·축소된 것이 많았다.

오영택 전국공무원노조 부정부패추방위원장은 “처벌 규정이 없기 때문에 허위로 공개하거나 공개를 거부해도 제재할 수단이 없다. 공무원들은 정보공개 업무를 업무 외 일로 여겨 귀찮아한다”라고 말했다. 전공노는 정보공개법 개정운동 및 조례 표준안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공개 및 공익 제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추세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특히 지난해 위키리크스를 통해 폭로된 외교 문서가 튀니지 등 아랍권 정권교체로 이어지면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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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경향신문〉이 지난 3월 한국의 위키리크스를 표방한 ‘경향리크스’ 사이트를 개설했다. 경향리크스는 지난 3개월간 300여 건에 이르는 제보를 받았다고 밝혔다. 추적이 불가능하도록 웹서버는 위키리크스와 같은 스웨덴에 두었다. 취합한 제보 내용은 성격에 맞게 〈경향신문〉 담당 부서에 할당된다고 한다. 중요도에 따라 A에서 F까지 등급이 매겨진다. 이 중 20~30%는 유의미한 정보로, 이미 몇 건은 기사화돼 독자를 만났다. 정진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삼화저축은행 사외이사 역임 건, 사랑의 열매 워크숍에서 행해진 안보교육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공익 제보가 활성화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 1992년 총선에서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을 고발했던 이지문 부대표는 공익 제보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1990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감사비리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은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구속된 뒤 파면 처분되었다가 6년 만에야 무죄 판결을 받았다. 관권 선거를 고발한 한준수 전 연기군수는 선거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부대표는 “버스 기사 한 분이 회사 측에서 현금을 횡령하는 걸 고발했다가 재계약에 실패한 뒤 2년 만에야 취업할 수 있었다”라며 제보자 보호 관련 재단과 기금 마련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정보공개 또한 아직은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재근 참여연대 시민감시팀장은 “지금까지 정보공개가 판공비 공개 등 기초 부분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국가의 고급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시도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감시견’이어야 할 언론이 ‘보호견’ 노릇 하니

김유승 교수는 정보공개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움직임으로 ‘거버먼트(government)2.0’을 소개했다. 거버먼트2.0은 웹2.0의 공유·참여 개념을 정부 행정과 결합하는 걸 의미한다. 정부기관이 시민이 요청하는 자료에만 답할 게 아니라 사용자 중심의 플랫폼을 구축하자는 개념이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하고 있는 ‘서울교육2.0’이 대표 예다. 서울시 교육청은 자체적으로 확보한 사설 교육기관의 정보를 활용해 ‘우리 동네 학원정보 알기’ 애플리케이션을 서비스하고 있다. 이를 활용하면 누구든 인근의 학원 위치와 과목별 수강료를 알 수 있다. 홈페이지에는 서울시 모든 학교에서 발주하는 시설공사의 집행 과정이 전면 공개된다. 정부기관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채널을 다양화하려는 시도다.

박래용 〈경향신문〉 디지털뉴스국 편집장은 “정보공개나 공익 제보에 대한 갈증은 기존 언론에 대한 신뢰 붕괴에서 비롯됐다. 워치독(watch dog:감시견)이 아니라 가드독(guard dog:보호견)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언론의 현주소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언론의 역할이 무시될 수만은 없다. 다니엘 돔샤이트 베르크는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과 시민단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위키리크스가 보여준 ‘디지털 공익 제보’의 가능성과 독립언론·시민단체의 감시 기능을 결합할 때 투명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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