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영도구 청학동 신도브래뉴 아파트는 지은 지 2년이 채 안 되었다. 계단 60개를 올라가야 508세대 단지가 나온다. 아파트 1층이 웬만한 건물 10층 높이다. 50m 대형 크레인 조종석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최단 거리다. 8차선 도로 너머,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다.

단지로 통하는 계단에 며칠째 외지인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 노동자들이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은 대량해고에 맞서 190일 넘게 파업 중이다. 올해 초 700여 명이던 인원이 6월 말, 100여 명으로 줄었다. 법원의 행정집행이 있던 6월27일, 노란색 안전모를 쓴 용역 300명이 이들을 작업장에서 들어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 지도위원이 있는 85호 크레인만 섬처럼 남았다. 크레인 중간 지점에 모여 있던 30명이 20명으로, 7명으로 시간이 갈수록 줄었다. 용역에게 끌려나온 노동자들도 파란색 작업복 차림 그대로 계단에 앉았다.
 

ⓒ시사IN 조남진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크레인 농성을 지켜보는 가족들의 심정은 참담하다.


6월28일. 며칠째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홍미애씨(37)도 있었다. 남편이 33m 크레인 위에서 ‘해고 철회’를 외쳤다. 전국이 장마였다. 상공에도 비바람이 불었다. 해고자들은 크레인 위에 천막을 쳤지만 장마철 비는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았다. 아파트 계단에 앉았던 사람들도 비를 피해 옆 주차장 입구에 앉았다. 멀리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크레인에서 남편이 전화를 했다. 잠시 비를 피했다고 하자 빨리 집에 가라며 “안 가면 뛰어내려 버린다”라고 말했다. 아내는 “그래보라”며 버텼다. 아내들은 남편이 안쓰러워 눈물을 흘리다가도 잠시 숨을 고를 땐 집에 있는 아이를 걱정했다. 신도브래뉴 아파트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이사하고 싶은 곳이다. 복직이 된다면 남편 직장과도 가깝다.

 

 

ⓒ시사IN 조남진마지막 남은 파업 노동자들이 85호 크레인을 점거했다. 오른쪽 맨 위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보인다.

사원아파트 ‘퇴거’ 통보받은 해고자

홍씨와 아내들의 보금자리도 아파트다. 영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김해시 내동 한진그룹 사원아파트다. 지은 지 20년. 임차료는 340만원이다. 201동과 202동, 총 215세대엔 한진중공업 사원과 그 가족들이 산다. 3개 동은 대한항공과 한진택배 등의 사원이 산다. 한진중공업 두 개 동은 지난해 회사가 400여 명을 해고한 이후 분위기가 좋지 않다. ‘산 자(비해고자)’와 ‘죽은 자(해고자)’가 이웃의 운명을 갈랐다.

홍미애씨가 사는 복도식 아파트 엘리베이터 입구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조합원 여러분 85호 크레인 밑으로 모여주십시오. 용기 내어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쓰인 A4 용지가 붙어 있다. 홍씨를 비롯한 해고자 50여 가구는 7월31일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번이 2차 통보다. 2월 초, 4월까지 집을 비우라고 했던 게 1차였다. 등기우편에는 ‘불법 점거’라는 표현이 있었다. 340만원으로 신도브래뉴는 커녕, 갈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

3년8개월. 홍씨 남편이 지하철 공사 현장 용접 등 단기직을 전전하다 정규직이 된 지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선박건조 과정에서 각종 장비를 장착하는 일을 한다. 홍씨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이번 파업 때 처음 알았다. 밖에서 하는 일을 잘 말하지 않는다. 배가 완성돼 인양하는 걸 볼 때 뿌듯하다고 말하는 남편을 보며 흐뭇했을 뿐이다. 남편은 교육생으로 들어왔다. 연수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면 하청업체로 보내진다. 소수만 직영으로 채용될 수 있는 면접권을 갖는다. 고3 때도 안 해본 밤샘 공부를 그때 했다. 합격했을 때는 시댁과 친정 식구 모두 너무 좋아했다.

사원이 되어 아파트에 왔을 땐 더없이 행복했지만 홍씨는 요즘 이웃이 야속하다. 파업 현장에서 이탈한 남편의 동료들이었다. 함께 싸우던 비해고자가 서서히 파업 현장을 빠져나갔다. 부산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 신청이 기각되고 노조원 퇴거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 받아들여진 게 결정적이었다. 노조도 미웠다. 홍씨는 노조가 조합원을 버렸다고 생각한다. 6월27일, 행정집행을 앞두고 노조는 회사 측과 일괄 복귀를 선언하는 합의서에 사인했다. 노조 협상이 타결됐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남은 조합원들은 지회장 단독 결정으로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총파업이나 정리해고 등의 안건은 노사협의회가 아니라 상급 노조의 동의가 필요한 단체교섭 사항임을 들었다. 채길용 지회장은 생활고로 비해고자의 이탈이 늘었다는 점을 합의 이유로 들었다.

 

 

 

 

ⓒ시사IN 조남진6월28일 농성장의 노동자들이 비를 피해 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멀리 85호 크레인이 보인다.

홍씨와 같은 동에도 비해고자가 많이 산다. 6월28일 오후,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지 않거나 뭔가 싶어 열었다가도 쾅 닫기를 수차례, 문 사이로 몇 분째 망설이던 김정은씨(가명)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노조의 합의 절차나 내용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김씨 남편은 지난 3월, 파업을 그만뒀다. 요즘은 교육장으로 출퇴근한다. 한진중공업 교육장은 원래 훈련생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직장폐쇄로 회사를 대신하고 있다.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에 퇴근이지만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외부 강사의 인간관계 강의를 듣거나 ‘생로병사’ 따위 비디오를 본다. 강의를 들으면서도 한진중공업 사태에 촉각이 곤두서 있다고 한다.

남편이 파업을 접고 나올 당시를 회상하는 김씨의 눈에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와 남편은 파업을 그만두고 나왔을 때 한 달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편은 초등학생 아이 둘과 아내를 위해 파업을 그만두었다. 가정의 생계를 놓고 따르기에는 노조 집행부에 확신이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생각이 달랐다. 그녀도 젊은 시절, 전자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파업 현장에서 사람이 빠지는 게 얼마나 남은 사람을 힘빠지게 하는 일인지 알고 있다. 

이웃 보기가 죄스러운 파업 비참여자의 아내

김씨는 신장이 좋지 않아서 일을 할 수 없다. 그것도 괴로웠다. 남편이 그래서 일찌감치 이탈한 게 아닌가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남편은 한진중공업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2003년 85호 크레인에 목을 맨 김주익 당시 지회장도, 지금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도 근거리에서 지켜봐왔다. 남편의 선택이 야속했다. 게다가 해고자는 모두 이웃이다. 아이의 학부모들이다. 인간관계 대부분이 힘들어졌다. 언성을 높이는 일이 많아졌다.

과거 김씨는 날이 더우면 에어컨을 켜는 대신 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그런데 요즘은 문을 꼭 닫고 지낸다. 누가 지나가다 들여다볼까봐서다. 해고자 가족과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한다. 모두 알고 있다. 몇 호 아빠가 교육장으로 가는지. 이웃 보기가 죄스럽고 미안했다.
문을 닫고 사는 건 김미옥씨(가명)도 마찬가지다. 비해고자인 그녀의 남편은 최근에 나왔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몇 개월간 수입이 없어 보험을 해약했다. 법원에선 남편이 불법점거를 했다며 각종 통지서가 날아왔다. 회사의 징계 문건도 날아왔다. 연수원으로 출근하지 않으면 해고당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지난달, 남편은 파업에서 이탈했다. ‘조금만 더 버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둘 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시사IN 조남진크레인 위에 오른 아들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끝내 오열했다.

교육장으로 나가는 김지노씨(가명)는 “부끄럽고 미안하다. 다른 이유는 다 핑계고, 결국엔 가정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농성장을 지키는 동료들도 모르지 않는다. 남아 있는 한 비해고자는 “이해한다. 다만 다음엔 우리 차례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잘못한 건 회사인데 동료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게 참 아프다”라고 말했다.

가장 난감한 건 아이들이다. 비해고자와 해고자의 자녀가 단짝이다. 어느 날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른들은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놀지 말라고 할 수도, 놀게 할 수도 없다. 사원아파트에 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인근 우암초등학교를 다닌다. 같은 반에서도 누구의 아버지는 출근을 하고 누구의 아버지는 투쟁을 한다. 하굣길, 사탕으로 개미를 꼬여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아이 둘에게 아빠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 “투쟁하고 있어요.”

김미옥씨의 둘째 아이는 수영장을 좋아한다. 체육관에 가려면 집 앞 연지공원을 지나야 한다. 지난 4월. 복직 투쟁이 마침 공원에서 열렸다. 수영장을 가는 날이었다. 어제의 동료들과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오늘은 수영장에 가지 말자고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가 가겠다며 보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빠가 왜 싸우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요”

해고자의 자녀는 더 빠르게 변해갔다. 홍미애씨의 딸 은서(9)는 성격이 쾌활하다. 홍씨가 딸아이 학교 앞에서 시급 4500원짜리 슬러시 파는 아르바이트를 해도 은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늘 반긴다. 그런 은서가 몇 번, 엄마를 따라 집회에 나갔다. 폭력적인 시위는 아니었다. 한번은 덩치 큰 용역 아저씨가 공장 문을 막아섰다. 아빠를 보려던 참이었다. 은서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는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때부터 현장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은서는 말했다. “나는 아빠가 왜 싸우고 있는지 그 이유가 정말 궁금해요. 아빠한테 친구들하고 잘 지내라고 말해줘요, 꼭.” 6월 마지막 날, 아빠는 결국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시사IN 조남진6월26일 쌍용차 해고자 가족이 한진중공업 노동자 가족을 만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


대충 집을 치운 홍미애씨가 다시 농성장으로 향할 시각이 됐다. 은서와 동생 은빈이는 이웃에 맡겼다. “또 이모네 가요?” “이모네 가기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이모가 힘들잖아요.” 그 집도 아이가 둘이다.

사원아파트를 나오는데 입구에 한진중공업 작업복을 입은 해고자가 막 다시 농성장을 향하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어머니는 “타결됐다면서? 퇴직금 준다는데 그만하면…”이라며 말로 아들을 붙들었다. “믿지 마세요. 끝난 거 아니에요.”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노모의 표정이 복잡했다. 싸움은,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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