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양국이 합의한 황금평 개발이 정작 기공식 이후 소식이 감감하고, 사업 주체로 떠올랐던 홍콩 신헝지 그룹(新恒基集團·신헝지는 베이징 발음이고 광둥어 발음으로는 신홍까이라고 함)의 관련 사실조차 부인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르면서 황금평 개발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몇몇 방송이나 언론이 ‘기공식에 동원됐던 굴착기 등 건설 장비조차 사라진’ 황금평 현장 르포를 통해 이 같은 분위기를 부추긴다.

그러나 지난 5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중 당시 중국 장쩌민 전 주석 회동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처럼, 이번의 ‘황금평 논란’ 역시 자칫하면 한국 언론이나 정책 당국, 그리고 지식사회의 북·중 관계 인식 수준만 드러내는 결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일-장쩌민 회동 문제와 관련해 이미 정책 당국은 “한국 정부 관계자들이 다각적으로 회동 사실을 확인코자 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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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양측의 면담이 불발된 것 같다”라는 내용을 ‘불필요하게’ 언론에 흘림으로써 스스로 정보력 부재를 드러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김정일-장쩌민 면담에 대해 북·중 양국은 장쩌민 전 주석의 입장을 고려해 양측 모두 만나지 않은 것으로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런 방침에 따라 한국 정부 당국이 아무리 확인하고자 해도 확인이 어려웠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만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는 것은 아전인수격 해석이라 할 것이다. 


‘6월8일 기공식 이후 공사 착공 소식이 없다’는 언론의 황금평 현지발 보도 역시 무책임하긴 마찬가지다. 현지 관계자 몇 사람만 체크해봐도 북한 서부의 대표적 곡창지대인 황금평에 이미 모내기가 끝난 상태라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잠깐 착공식을 했지만 실제 착공은 가을걷이가 끝난 11월에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공단 조성을 하려면 시행사 선정에서부터 용지 조사와 설계 등 기초 작업에만도 6개월 이상 걸린다는 것 역시 상식이다.

또한 북·중 양국이 황금평 개발에 합의한 이면에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중앙정부 차원에서 서로 얽혀 있어 중국의 랴오닝성이나 단둥시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도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업 시행 과정에서 세부적인 이해관계 충돌이나 조정은 있을 수 있겠지만 큰 틀의 방향이 흔들리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국내 언론이나 정책 당국 역시 북·중 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더 이상 사안별로 분리해 맥락 없이 좌충우돌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09년 7월 중국에서 벌어진 대북정책 전환 움직임과 이에 직결된 10월의 원자바오 총리 방북, 8월의 창춘 정상회담과 ‘일구양도(一區兩島) 개발계획’, 그리고 그 완결판으로서 지난 5월의 김정일 위원장 방중의 흐름 속에서 황금평 개발이 어떻게 부각됐으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총체적 시각을 가져야 할 때이다.

김정일의 양저우 방문은 ‘컴백 2001’ 시도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5월 김정일 위원장 방중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5월20일 시작된 김 위원장의 전격적인 방중 행로가 장쩌민 전 주석의 고향인 남방의 양저우로 향하면서 북·중 관계에 정통한 전문가 사이에서 흘러나온 얘기가 바로 ‘컴백(come back) 2001’이었다. 즉 이번 김 위원장 방중은 지난 2001년 그의 상하이 방문 및 장쩌민 주석 회동과 유사하며 그 연장선에서 기획된 것이라는 얘기다.


ⓒ연합뉴스6월8일 열린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북·중 공동개발 착공식 모습.

2001년은 북한이 21세기의 첫해라고 의미를 부여하던 해였다. 보통은 2000년을 21세기의 첫해로 계산했으나 북측은 2001년을 첫해라 했다. 따라서 2001년을 맞이하는 북한의 각오 역시 여느 때와 달랐다. 과학기술 중시와 신사고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또 21세기를 맞는 북한의 경제 전략으로 지역특화 전략이 급부상했다. 이 지역특화 전략은 1996년 원산·남포·신의주를 보세가공구로 하고자 했던 시도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1996년 북한은 내부적으로 ‘2010 계획’을 수립했다. ‘수령님 탄생 100년이 되는 해(사실은 2010년이 아니라 2012년)에 조선 민족이 세계 어디에서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살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2012년 강성대국론’의 효시라 할 것이다.

21세기의 첫해인 2001년 ‘2010 계획’은 평양·남포·신의주·원산·함흥에 대한 지역특화 전략으로 구체화됐다. 평양은 당시 유행하던 IT와 첨단산업, 남포는 경공업, 신의주는 기계공업, 원산·함흥은 과학기술을 특화 발전시킨다는 전략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신의주 개발은 이 전략의 성패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 2001년 1월 김 위원장의 상하이 방문은 바로 신의주 특구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기 위함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2010 계획’에서 목표로 했던 ‘수령님 서거 100년’, 즉 2012년이 바로 내년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 2010 계획은 ‘2012년 강성대국론’으로 바뀌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이런 점에서 북한이 2012년을 몇 년 앞둔 2009년 하반기 이른바 ‘8대 특구 전략’이라는 새로운 지역특화 전략을 수립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8대 특구는 2001년의 지역특화 전략과 지역적으로 거의 겹친다. 평양·남포·신의주·원산·함흥은 서로 일치하고, 이 밖에 나진선봉·청진·김책이 새로 포함됐을 뿐이다. 2001년과 마찬가지로 김정일 위원장이 이 8대 특구 전략의 시동을 신의주 특구부터 시작하고 싶어하는 것 또한 닮은꼴이다. 지난 5월의 중국 방문을 ‘컴백 2001’이라 부르는 연유가 여기 있다.


ⓒ연합뉴스북한과 중국의 최대 교역 거점인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신압록강대교 건설이 본격화됐다(왼쪽).

그때나 지금이나 비공식 방문의 형태를 취했다는 점 역시 똑같다. 즉 국가 대 국가의 정식 외교 방문이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의 당 대 당 교류 형식을 밟은 비공식 방문이다. 2001년 김정일 위원장이 노동당 총서기로서 중국공산당의 장쩌민 총서기를 만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01년 1월19일 회동에서 당시 장쩌민 주석이 고개를 숙인 채 김 위원장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는 이례적인 모습이 중국 국영 CCTV에 방영돼 주변을 놀라게 했다. 당 대 당의 관계에서는 조선노동당이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증거이다. 멀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 투쟁하던 시기나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국공 내전기 북한 측의 지원, 오늘날에도 북한이 미국의 압박에 맞서 중국 동북 3성을 지키는 방파제 노릇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게 바로 김정일 위원장의 주장이었던 셈이다. 당시 장쩌민은 전폭적인 지원을 할 용의가 있으니 중국식 경험을 받아들이라고 맞섰다(〈시사IN〉 제194호 참조).

이번 방중 과정에서도 김 위원장은 양국 공산당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퍼포먼스를 했다. 방중 첫날인 5월20일 헤이룽장성의 징포후(경박호)를 들른 것이다. 징포후는 1936년 2월27일~3월3일 김일성 주석이 그 유명한 난후터우(남호두) 회의를 열어 중국공산당이 주창한 동북 항일연군에 참여할 것을 결정한 곳이다.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1934~1935년 중국공산당 내 급진파들에 의한 반민생단 사건(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일본군의 간첩 조직인 민생단원으로 몰아 살해한 사건)으로 2000여 명이 피살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바로 직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과 손잡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다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위원장이 징포후에 들른 뜻이 뭔지를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원로들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금평 개발과 나진항 개방의 이면

결과론적이지만 2001년 방중은 실패로 끝났다. 그 뒤 양빈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북·중 관계는 꼬여만 갔다. 경제 개발에서 가장 핵심인 종잣돈(시드머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북한 경제는 지난 10년간 어떤 시도를 해도 좋아지기 어려웠다. 중국공산당이나 조선노동당이나 당 대 당 빅딜에 대한 준비나 여건이 그만큼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AP Photo김정일 국방위원장(위)은 2001년 장쩌민 당시 주석(오른쪽)을 만나 신의주 특구 구상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여건이 무르익었다. 변화의 바람이 중국에서 먼저 불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 동맹 우선 정책으로 전환한 데에 자극을 받아온 중국은 2009년 7월 후진타오 주석을 소조장으로 하는 조선반도 연구 소조를 결성했다. 그리고 한 달간 내부 토론 끝에 대북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북한 비핵화에 초점을 맞춰왔던 외교부 노선을 폐기하고 북한 체제의 안정화 및 중·조 협력을 우선하는 중공당 중앙대외연락부의 손을 들어줬다.

중앙대외연락부는 중공당 내에서 대북 정책을 비롯한 대외 정책을 전담하는 직속 조직이다. 2004년 말 북한에 대한 대규모 경협과 ‘중·조 일치(中朝一致)’를 주요 내용으로 한 ‘신조선 전략’을 수립한 곳이기도 하다. 중·조 일치는 1930년대 일제가 조선의 나진·선봉과 신의주를 축으로 만주를 통합하려 한 ‘만선일여(滿鮮一如)’ 정책의 중국판이다. 대외연락부는 당시 이에 입각해 당·정·군 및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국유기업을 총망라한 8개 항목의 대북 접근 전략(8대 책략)을 비밀리에 입안하기도 했다.


ⓒAP Photo후진타오 주석(맨 오른쪽)은 이명박 정부의 한·미 동맹 우선 정책에 자극받아 북한과의 협력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정책 기조를 바꾸었다

중공당 중앙대외연락부가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중국의 대북 정책이 전광석화처럼 바뀌어왔다. 북·중 접경지역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계획들이 중앙정부 차원의 국가계획으로 당장 승격되기 시작했다. 즉, 2009년 8월1일 랴오닝성이 지방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던 임해 벨트 계획을 국무원 차원의 국가계획으로 승인한 데 이어, 8월30일에는 지린성의 창지투 계획 역시 국가계획으로 격상시켰다. 이어 10월에 원자바오 총리가 북한 방문에 나서 신압록강대교 건설과 압록강 하구 지역 개발 및 나진항에 이르는 원정리 도로 개보수 공사 등 3대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북한으로서는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특히 중국이 창지투 계획에 따라 중국 동북 지역의 물류를 나진항을 통해 동해로 뽑아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짐에 따라, 그 반대급부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중국공산당 중앙대외연락부의 부상


ⓒ연합뉴스북한 신의주시에 속한 압록강 지대가 지난해 8월 집중호우로 침수됐다. 이 지역은 비가 오면 침수 피해가 잦다.

북한이 신의주 개발과 연동해 중국 측에 공동의 시범사업을 처음 제안한 곳은 원래 황금평이 아니라 위화도였다. 위화도를 개발하고 위화도와 단둥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자는 제안이었다. 북한은 2004년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폐지하는 대신 ‘신의주·대계도(大鷄島) 경제개발지구’ 개발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때도 신의주와 가까운 위화도는 그 계획표 안에 포함돼 있었지만 황금평은 없었다. 그러나 랴오닝성이나 단둥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위화도가 저지대에 위치해 비만 오면 침수 피해를 입는 데다가, 무엇보다 단둥시는 위화도 반대편인 랑터우(浪頭)항 쪽으로 개발계획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던 차에 원자바오 총리 방북이 이뤄져 ‘압록강 하구 지역 개발’에 대한 총론적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압록강 하구 지역에 포함되는 비단섬·남신의주·황금평·위화도 중에서 어디를 먼저 개발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북·중 간에 황금평이 우선 개발 지역으로 거론된 시기를 2010년 8월 창춘 정상회담 때로 본다. 그 한 달 전인 2010년 7월에 북한에서 합영투자위원회(위원장 이수용)가 출범했는데, 그 제7국의 담당 지역이 여전히 압록강 하구 지역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8월의 창춘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측이 위화도 대신 중국 쪽에 가까워 단둥시가 받아들이기 쉬운 황금평으로 대상을 특정해 제안했고, 이에 따라 양측의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이때를 계기로 황금평 개발은 두만강 쪽의 나진항 개방과 연동된 북·중 양국 중앙정부 차원의 국가급 프로젝트로 격상됐다. 북한이 원하는 대로 황금평 개발이 안 되면 중국이 원하는 나진항 개방 역시 차질을 빚게 된다는 점에서 서로 맞물린 것이다.


홍콩 소재 부동산·금융 재벌인 신헝지 그룹의 가오징더(高敬德) 이사장.
8월 창춘 정상회담의 내용을 구체화하는 실무 총괄회의가 2010년 11월20일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이른바 ‘일구양도(一區兩島:나선 지구와 황금평·위화도) 개발’의 윤곽을 결정한 매우 중요한 회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다만 지난 2월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조·중 라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경제지대 공동개발 총계획 요강〉의 첫머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의 라선 경제무역지대와 황금평 위화도 경제지대 공동개발 및 공동 관리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 계획 요강이 작성됐다고 서술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 바 있다.

극소수 전문가들 사이에서 ‘중·조 경제협력협정’으로 불리는 이 협정의 체결 당사자는 중국 측에서는 천더밍 상무부장, 북한 측에서는 이수용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 협정의 대다수 내용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8월 창춘 정상회담에서 정부주도·기업주체·시장운영·상호이익이라는 4대 원칙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는데 여기에 ‘공동개발 공동관리 원칙’이 더해졌고, 이에 따라 북·중 양국이 ‘공동지도위원회’를 구성할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중국 국영기업의 대북 투자를 중앙정부가 보장하는 획기적인 지원책이 이때 마련됐다는 점이다. 즉 손실이 발생할 경우 손실액의 80%까지 정부가 보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80% 보전책이 올해 2월 이수용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보장된 것으로 보도했지만 실은 지난해 11월20일 포괄합의 과정에서 이미 합의됐고, 2월에는 이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 2월 기자가 옌지·투먼·훈춘 지역을 방문했을 때 이미 창춘 소재 야타이시멘트 회사나 이치자동차, 그리고 베이징의 중쯔그룹 등 국영 대기업의 나선 진출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었다. 바로 그 배경에 11월 협정이 있었던 것이다. 홍콩 소재 부동산·금융 재벌인 신헝지 그룹이 황금평 개발에 100억 달러를 투자하고, 손실금에 대해서는 중국 정부가 80%를 보전해주기로 했다는 보도 내용 역시 바로 이 합의에 근거한 것이다. 


대북 투자 손실액 중국 정부가 보전해주기로

이처럼 황금평 개발은 중국 처지에서는 나진항 진출과 연동돼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착수해야 할 사업이다. 그러나 그 배후지인 신의주 개발 문제에 이르면 현재의 단둥시나 랴오닝성 정부, 더 나아가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단순 경제논리로만 따진다면 단둥시나 중국 중앙정부가 신의주 개발에 굳이 뛰어들 이유는 없다. 단둥의 한 소식통은 “신의주에 변변한 항만시설이 없다는 것이 큰 약점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중국은 신의주가 제3세력에 의해 개발되는 것보다는 아예 개발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게 최선일 수 있다. 중국이 신압록강대교를 신의주 남쪽으로 뺀 이유도 랑터우 개발과 연동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신의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행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그러나 신의주 개발을 위해 황금평 개발을 시작했고, 또한 신의주 개발을 지역특화 전략의 발화점으로 여기는 북한으로서는 이를 용인하기 어렵다. 결국 이 문제는 행정 권력을 의미하는 정부 대 정부 채널이 아니라 양국 관계를 전략적으로 조망하는 당 차원의 대화가 필요한 사안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장쩌민 전 주석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이를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이었던 셈이다. 즉 2001년 김정일-장쩌민 회동에서 북한이 중국식 경험을 받아들이면 전폭 지원하겠다고 한 장쩌민 전 주석의 약속이 여전히 양국 관계의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것이다. 21세기의 문턱에서 좌절했던 2001년의 경험이 ‘2010 계획’의 원년으로 설정했던 2012년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할 것이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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