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주웅서명숙 〈시사IN〉 편집위원(왼쪽)은 2006년 스페인 산티아고에 다녀온 뒤 ‘느리게 걷기, 느리게 생각하기, 느리게 살기’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
독일 외무부장관 요시카 피셔는 한때 중증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러나 체중 감량을 위해 시작한 달리기에 빠져든 그는 “달리기를 못하는 게 술을 끊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힘들다”라고 말했다. 800km 산티아고 길(창간호 102~105쪽 기사 참조)을 걷고 돌아온 뒤의 내 증세가 그랬다. 두세 시간, 하루 이틀 걷는 것으로는 해갈이 나지 않는달까,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낯이 없어 차마 입에 올리진 못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다시 길 위에 몸을 내어맡기고 ‘구름에 달 가듯이’, 이만하면 ‘많이 묵었다’ 싶게 푸지게 걷게 될 날을….

‘사오정’의 덫에 걸린 남편을 부추기다

그 기회는 뜻밖에도 빨리, 원하는 않는 방식으로 찾아왔다. 올 2월, 남편이 직장에서 잘린 것이다. 사오정 시대, 오십이 다 된 그였으니 그닥 놀라운 일도 아니었건만, 직장에 멸사봉공했던 그가 느낀 배신감과 낙담은 지켜보기에도 고통스러웠다. 잘됐다, 이 기회에 당신 평소 해보고 싶었던 일 딱 한 가지만 해보라며 부추겼다. 둘 다 백수가 됐는데 애들 공부시키고 먹고 살 궁리나 해야지 무슨 철딱서니 없는 소리냐고 펄쩍 뛰던 남편이 마침내 꽁꽁 숨겨뒀던 열망을 펼쳐 보였다. 남미의 끝이라는 파타고니아에 가서 야영 트레킹을 하고 싶었단다. 조직과 일과 가족에 쫓기고 부대끼면서 살아온 한국 남자의 로망과 판타지였던 셈이다.

가족 생각, 장래 걱정 딱 잊고 한번쯤 그래보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남편은 너무도 비싼 비행기 삯 때문에 끝내 망설였다. 대신 택한 곳이 바로 네팔이었다. 두어 해 전부터 일상의 비상 탈출구로 암벽등반을 택했던 그는 늘 산을 그리워했고, 특히 빙벽과 설산을 동경했다. 남편은 경로와 방식을 놓고 고심하다가 첫 고산 여행이니만큼 여행사를 통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떠나기로 했다.  

출발을 앞두고 짐을 꾸리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질투심과 부러움에 몸이 달았다. 그럴 즈음 어떤 신문사에서 여행 관련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옳다구나 싶었다. 만날 산티아고 타령만 할 순 없으니 이번에는 가장 긴 길 대신 가장 높은 길을 경험해보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티격태격 끝에 결국 우리 둘은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3월 초, 히말리야 지방의 건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일행 12명, 일정은 14박15일. 짧은 휴가도 함께 보내기 힘들었던 우리 부부에게는 파격적으로 긴 동반 여행이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 순수한 사람들

오직 혼자 자유롭게 길을 떠났던 산티아고 순례와는 달리 남편을 대동하고 여행사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네팔 트레킹이었지만, 자신의 두 발로 땅을 디디면서 온몸이 녹작지근할 정도로 하냥 걷는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다른 점도 많았다. 네팔의 자연은 발달한 문명과 세련된 문화가 적절히 반영되고 스며든 스페인 산티아고 길과는 달리 ‘절대 순수’에 가까웠다. 머나먼 유럽 산티아고 길에서는 기후가 온후하고 풍광이 아기자기해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을 자주 받았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 국가 네팔에서는 그 엄청난 규모와 극적인 프로필에 압도되고 놀라워하기에 바빴다. 한번 길을 잃으면 헤어나지 못할 성싶은 무시무시한 초록으로 뒤덮인 정글숲, 너비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깊고 깊은 협곡, 까마득한 구름 위를 뚫고 오연히 솟아오른 설산의 연봉들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희들, 이래도 너희가 잘났다고 까불래?” “인간들아, 대체 왜들 그렇게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핏대 올리면서 사냐?”

풍광은 이렇듯 이국적인데도, 사람들은 우리와 퍽 닮아서 참으로 편안했다. 안나푸르나 남봉으로 가는 길목의 산중 마을 촘롱에서 나는 일순 착각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4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 고향 서귀포의 어느 올레(집에서 마을 골목길로 난 작은 길을 뜻하는 제주어)에 서 있는 듯한….

어린 아우를 들쳐 업은 소녀들(제주에서는 ‘애기업개’라고 불렀다)은 소맷부리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스웨터를 입고 새까만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 일행에게 ‘스윗 스윗(Sweet! sweet!)’을 달라고 외쳤다. 여행사에서 준 가이드북에는 여행자들이 이곳 사람들에게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줘 이를 썩게 만들고 있으니 특별히 주의하라고 씌어 있었지만, 현지인 가이드는 마음이 내키면 그냥 주란다. 이렇듯 작은 일에도 100% 똑떨어지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내주고, 때로는 짐짓 모른 체하고 지나쳤다.

진저리나는 ‘입맛 국수주의’

절대 순수의 자연 속에 녹아들어서 걷노라면 한없이 자유롭고 감미로워서 혼자 나선 길인지, 부부 여행인지, 단체 트레킹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데 모이는 세끼 식사 때나 휴식 때에는 ‘단체’임을 실감하게 되기 마련. 더불어 어울린다는 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었다. 

딱 이틀만 빼놓고는 삼시 세끼 전부 한국식을 강제로 즐겨야 했던 게 그중 가장 못마땅한 일이었다. 본디 네팔 트레킹에는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와 짐을 운반해주는 포터들이 동원된다. 그런데 한국팀에는 요리사 한 명과 키친보이 대여섯 명(요리사 보조)의 대부대가 별도로 따라붙었다. 그들은 프로판가스와 한국에서 공수해온 온갖 요리 재료와 반찬, 현지에서 조달하는 각종 유제품과 야채 등속을 커다란 대바구니에 담아 날랐다. 머리띠로 대바구니를 고정시킨 그들은 우리 일행보다 한발 앞서 떠나고 한발 앞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 식사를 준비했다. 

ⓒ시사IN 서명숙네팔의 아이들은 우리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의 눈은 새까맣고, 소맷부리는 반질반질했다.
눈물겨운 그들의 노력에 힘입어 우리는 네팔의 고산 마을에서 냉면을, 설산의 산장에서 김치꽁치찌개를, 목적지인 베이스캠프를 다녀와서는 삼계탕을 맛보았다. 3000m급 직전의 산장에서 마지막으로 술을 마시고(해발 3000m 이상에서는 고소증을 염려해 술을 못 마시게 한다) 난 다음날에는 북어해장국까지 나왔으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집에서도 못 받는 대접을 누린다고 다들 환호했다. 한국 사람들은 밥심이 최고라고, 이렇게 먹어야 산에 오른다고 기염을 토하는 이도 있었다. 한 독일인 트레커는 십수 명이 날마다 떡 벌어지게 한 상씩 차려 먹는 우리 일행의 식사 풍경을 두고 ‘한국 사람들은 날마다 파티를 하는 것 같다’고 부러움인지 비꼼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수고로운 음식을 끼니마다 앉아서 받아먹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한국 음식이라야 기운을 낸다는 ‘입맛 국수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럴 거면 그냥 한국에 있지 외국은 왜 돌아다니나 싶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네팔의 설산 산장에서 파는 네팔식 만두와 네팔식 녹두죽인 ‘달바트’가 어찌나 먹고 싶던지. 결국 일행에서 빠져나와 혼자만 다른 산장에서 저녁을 먹는 바람에 남편과 대판 싸우고 말았다. 같이 가자고 했는데 자기가 안 따라나서 놓고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단체관광은 따로 챙기고 고민할 게 없어서 편한 대신,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신경을 써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아, 그 깜깜한 하늘에서 쏟아진 별빛!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해발 4130m)에 가까워질수록, 초록은 사라지고 흰색이 도드라졌다. 설산의 자락에 점점 다가가고 있음이 실감났다. 추위가 조금씩 느껴지는가 했더니 빙하 지역이 나타났다. 난생 처음인지라, 혹여 빠질세라 구를세라, 한발 한발 조심조심 내디디면서 그 지역을 통과했다. 온 길을 다시 보니 어찌 저런 곳을 지나왔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돌아갈 땐 어쩌지.  

그래도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해발 3700m)에 닿으니 돌아갈 걱정은 사라지고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말로만 듣던, 그림으로만 보던 그 멋진 프로필의 산들이 사방에 펼쳐졌다.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였음에도 햇빛은 화사하고 따뜻했다. 반팔 차림으로 갈아입은 일행은 다음날 거사를 앞두고 마지막 산장에서 다시금 주위 시선을 끌며 호사스러운 점심식사를 했다. 

헌데 점심을 끝내자마자 하늘에서 뭔가가 쏟아져내렸다. 설산은 배경인 줄만 알았는데, 진짜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서운 기세로 내린 눈은 오래지 않아 우리가 반팔 차림으로 오찬을 즐기던 야외 테이블을 묻어버렸다. 일행은 롯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음날 일을 염려했다.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는 못 갈 것 같다, 고립되어 보급품이 다 떨어지면 먹을 것도 없다는 둥.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무관하게 난 롯지의 난로 앞에서 네팔 특유의 밀크티를 마시면서 펄펄 내리는 눈을 ‘즐감’했다. 하늘이 하는 일이니 인간의 걱정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으므로. 설산 위에 내리는 눈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았다 여겼기에….  

저녁 8시께 눈은 거짓말처럼 뚝 그쳤고, 현지 가이드는 산행이 가능하다고 최종 통보했다. 내일 이른 산행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숙소 바깥으로 나왔다. 

혹 눈이 오나 싶어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난 숨을 훅 들이쉬었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금세 내 머리 위로 쏟아져내릴 듯 촘촘히 박혀 있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날랜 칼로 도려낸 듯한 마차푸차레 봉과 잘생겼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안나푸르나 남봉이 낮보다도 더 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길에서 만난 별들은 누군가를 위해 따다 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강화도 민통선 안 철산리 바닷가에서 올려다본 별들이 그랬듯, 더럽혀지고 헝클어진 마음을 한순간에 정화시켜주는 듯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순백의 설원을 가로질러 마침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그곳 산장 벽에는 글귀를 적어넣은 기념사진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남편은 종이를 한 장 꺼내 자기 증명사진을 붙이고 그 밑에 초등학생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한자 한자 적어갔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모든 원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운을 얻고 간다는, 요지였다. 내가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자신을 사랑하게 됐듯이, 그 역시 설산을 오르면서 자신을 되찾게 된 모양이었다. 걷는다는 건 몸으로 하는 기도요, 길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道)임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기자명 서명숙(본지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