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6월16일(목)
‘파리의 택시 운전사’, 한국의 학벌 사회를 말하다
- 홍세화(〈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제2강. 6월23일(목)
한국 대학이 베끼지 않은, 미국 대학의 사회적 책임
- 조기숙(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제3강. 6월30일(목)
대학의 경쟁력을 생각해도 ‘인문학’이다
- 안병진(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제4강. 7월7일(목)
대학 서열과 학벌 사회 해소의 또 다른 답: 평생학습 사회
- 한숭희(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제5강. 7월14일(목)
대학 서열체제 개혁의 대표적 전략,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를 말한다 - 정진상(경상대 사회학부 교수)
▶제6강. 7월21일(목)
‘미래 교육비전 2030’으로 본 대학체제 개편
- 이종태(전 국가교육혁신위원회 상임위원)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은 학벌 중시 풍조가 학문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렀다. 가난한 농가에서 소를 팔아 마련해 낸 등록금으로 세운 대학이라는 뜻이다. 과도한 부담을 탓하면서도 그저 개인이, 가정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 등록금 문제는 상아탑을 벗어나 거리에서,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등록금 문제뿐 아니라 학벌 중심으로 서열화한 대학 체제에 대한 고민도 깊어가고 있다.

때마침 교육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이 6월16일~7월21일 6회에 걸쳐 ‘아하! 대학, 그렇게 바뀌는구나’라는 연속 강연회를 개최한다. 오랫동안 ‘대학 문제’에 천착한 이들이 강사로 나선다. 첫 번째 강연자로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이 나섰다.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의 공동 대표를 지낸 홍세화 편집인은 프랑스 사례와 비교하며 한국의 학벌 중시 풍조가 어떻게 학문을 왜곡하는지를 지적했다. 대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 연속 강의를 지상 중계한다.


2002년에 프랑스에서 귀국했다. 그러고서 바로 가입한 시민단체가 ‘학벌없는사회’였다. 얼마 전까지 공동 대표를 했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교육 문제이고, 그 핵심이 학벌 사회에 있다고 보았다.

프랑스에서 두 아이가 공교육 혜택을 받았다. 프랑스로 건너갈 때 여섯 살이던 딸아이는 (세 살부터 시작하는) 유치학교, 초등학교 5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마치고 파리 3대학을 졸업했다. 세 살이던 사내아이는 파리 10대학을 마치고, 파리 1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에서라면 가난하다는 이유로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운이 좋았는지 외국에서 가난한 이주노동자의 자식으로 기죽지 않고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럽의 진보적 교육사회학자의 주된 관심은 교육을 통해 계급·계층 이동이 가능한가였다. 20년에 가까운 연구 결과는, 교육은 대물림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 연구자는 계층 이동을 위한 특단의 조처로 수학의 가중치를 세 배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문화 자본에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과목이 수학이므로 수학의 비중을 세 배 늘려 교육을 통한 계층 순환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수학·철학의 비중이 높다. 이미 비중이 높은 수학을 세 배로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리였다. 여하튼 이런 연구 결과와 1968년 5월의 변혁 국면이 만나면서 전국의 대학을 평준화하고, 파리에 있는 열세 개 대학에 번호를 매기는 조처가 이뤄졌다.

“대학 평준화로 가야 한다”

교육의 장은 결국 계급투쟁의 장이다. 어떤 사회든 엘리트층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에 걸맞은 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갖는가가 중요하다. 한국의 학벌 사회는 그런 면에서 부정적이다. 능력도, 사회적 책임의식도 없는 엘리트들이 학벌 사회로부터 형성되고,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점한다. 학벌이라는 서열을 내면화하면서 그 지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구조이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결국 대학 평준화로 가야 한다.

사람들은 경쟁력을 말한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경쟁이 시작되는 구조와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경쟁이 끝나는 구조, 둘 중 어디에 경쟁력이 있겠는가. 평준화라고 하면 그저 하향 평준화를 떠올린다. 이는 보수 언론이 떠드는 내용을 머릿속에 입력한 것이다.

프랑스는 수평적으로 평준화되었고, 학사 관리가 철저하다. 대학에 들어가면 1년에 350유로(55만원 정도)를 학비로 낸다. 그중 30만원가량이 학생의료보험료다. 대학의 공공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국은 어느 대학에 갔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입학하면 자동으로 졸업한다. 유럽에서는 공부를 대충해서는 진급이 안 된다. 내 기억에, 프랑스 대학에서 2년 과정을 2년에 마치는 비율이 28%였다. 낙제를 한 번만 허용한다. 그러니까 3년에 2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 학생 가운데 60%가 진급을 못해 퇴학당한다. 

 

ⓒGamma프랑스 낭트 지역 고등학생들이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치르고 있다.

두 아이는 고등학교 3학년까지는 하루에 8시간 반을 잤다. 학원에 가본 적도 없다.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가정통신문을 받았다. 아직 성장하는 아이인데, 어떻게 밤 한 시 넘어 재웠느냐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인지 딸아이에게 물었다. 모파상의 소설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새벽 3시까지 읽었다고 했다. 그러고서 학교에 가서 존 것이다. 조니까 어떻게 된 거냐 선생님이 물었고, 소설책이 너무 재미있어 늦게 잤다고 대답하니까 그렇게 가정통신문이 온 거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는 아이가 당연히 잠자는 시간이었다. 밤새워 공부한 것은 대학에 들어간 뒤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순간에 순서가 정해지고, 프랑스는 대학에 들어간 순간 본격적으로 경쟁이 시작된다. 한국에 와서 자주 들은 얘기 중 하나가 어느 대학이 세계 몇 위라는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파리 1대학에서 13대학까지 있다고 하니, 파리 1대학이 제일 좋은 대학이냐고 나에게 묻는다.(청중 웃음) 중증이다.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석차를 받은 적이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태어나면서 피부색을 선택할 수 없듯이 두뇌 용량을 선택할 수 없다. 부모의 경제 자본, 문화 자본이 아이의 학업 성적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에게 석차를 매기고 사회적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지적 인종주의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모두 지적 인종주의자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석차를 주는 것. 유럽의 시각에서 보면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석차를 주고, 학교별 순위를 매기고, 그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석차 없이 절대 평가만 한다. 20점 만점에 얼마라는 식이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의 합격점은 10점이다. 전체 평균 점수, 해당 학생의 점수, 동급생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 이렇게 4개가 나온다. 교사에 따라 동급생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적지 않기도 한다. 대학에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가차없이 낙제시킨다. 이제 성년이니 네 공부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책임의식을 강조한다. 이렇게 평준화된 대학이 우리의 서열화한 구조에 비해서 경쟁력이 있다. 경쟁력을 하도 따지니까 하는 말이다.


인문·사회과학이 암기 과목이라고?

일부에서는 그랑제콜(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소수 정예의 신입생을 선발하는 프랑스의 엘리트 고등교육기관-편집자 주) 얘기를 꺼낸다. 프랑스는 권력 지향의 학교인가, 학문 지향의 학교인가를 구분한다. 권력 지향 학교에는 학위가 없다. 학위를 받으려면 ‘학문 학교’인 대학으로 가야 한다. 나름대로 전문 엘리트를 양성하면서 이에 대한 견제가 가능하다. 적어도 학문과 권력이 한통속이 되지 않도록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학문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수학으로 나눌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에는 사람의 주관성이 개입할 수 있다. 전자는 정답이 없고, 후자는 정답이 있다. 한국에서 인문·사회과학이 뭐냐고 물으면 ‘암기 과목’이라고 대답한다. (청중 웃음) 정말 기가 막힌 상황이다. 우리가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방식은 용어와 연대를 암기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암기할 때 유럽의 아이들은 글쓰기를 한다. 철학만 글쓰기로 평가하는 게 아니고, 역사와 사회과목에서도 글쓰기가 중요하다. 큰 차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나. 인문·사회과학이 어떤 학문인가.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을 뜨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암기 잘한다’는 말로 통한다. 인문·사회과학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아닌 학생의 차이는 시험을 보기 전에 잊어버리는 학생과 시험을 본 다음에 잊어버리는 학생, 이 차이다. (청중 웃음) 기존 체제의 질서에 담긴 객관적 사실을 숙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암기는 필연적으로 보수성을 갖게 된다.

지금 논술 시험은 목적의식이 다르다. 글쓰기는 주체적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논술은 아이들을 또 한번 골탕 먹이기 위한 것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변별력을 끄집어내기 위한 게 목표이다.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학생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사고력, 논리력, 인식 능력, 감수성을 키우려면 글쓰기가 필수적이다. 글쓰기를 안 한다는 것은 인문·사회과학을 안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사라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근대식 교육이 일제 때에 접목되었다. 일제 지배세력이 식민지 백성에게 생각을 형성하고 고민하고 정리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그대로 온존된 채 서열화한 대학이 애당초 정답이 없는 인문·사회과학을 정답이 있는 학문으로 비틀어 학생들을 줄 세운다. 글쓰기로는 줄 세우기가 어려우니까 객관적 사실을 숙지했나 안 했나로 줄을 세운다. 그래서 암기 과목이 된 것이다. 희한한 상황이다.

프랑스 역사 교사와 100점 만점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에게 중·고등학교 때 역사 과목에서 몇 점을 받았나 물었다. 내가 받은 점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보다 잘 한 학생은, 못한 학생은 몇 점 받았나 물었다. 한참 있다가 이 교사의 말이 이랬다. “대단하다. 너희 나라 교사들은 네가 역사를 보는 안목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냐.”(청중 웃음) 역사 공부를 왜 하는가. 역사를 통해 권력이 어떤 것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 공부를 연대를 외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생각의 주머니’라는 표현을 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지만 생각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커가면서 생각의 주머니를 채워간다. 한국에서는 책을 읽지 않아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의 주머니가 빵빵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은 책을 읽지 않을 경우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는 무식하다.’(청중 웃음) 요즘은 책을 읽지 않아도 아무도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의 주머니가 헐렁하면 뭔가를 집어넣으려고 할 텐데. 이미 빵빵하게 채워진 생각을 갖고 누구나 고집을 부린다. 내 삶의 푯대가 되는 생각이 어떻게 채워졌을까.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해야 한다. 내가 독서의 주체, 토론의 주체이다. 반면 암기를 할 때 나는 철저한 수동태이다. 주어진 것만 받아들인다. 주체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안목은 어떻게 생겼나? 암기를 통해서? 불가능한 얘기다. 


지배세력에게 ‘의식화’된 한국인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대학 서열화가 인문·사회과학에서도 석차를 매기고, 학문의 감수성을 왜곡해 정답이 있는 암기과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학 서열화가 인문·사회과학을 죽여버렸다.

운동권에서 예전에 ‘의식화’라는 말을 썼다. 잘못된 말이다. 이 말을 쓰면서 지배세력에 의해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 의식화를 잊게 만들었다. 지배세력이 얼마나 철저하게 반공 의식화, 자발적 복종의 의식화를 시켰나. 그런데도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 오히려 ‘의식화’시킨다고 역공당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자신이 지배세력의 의식을 고집하고 있는지, 그 의식을 벗겨내는 게 과제라고 생각한다.

학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학생들도 ‘사회적 발언력을 높이려면 이 체제에서 인정하는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묻는다. 학벌이 작용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막상 사회적 발언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정작 자신이 왜 사회적 발언력을 가지려 했는가 하는 동기가 실종되는 경우가 많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가.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다가 세상에 의해 내가 변화되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에게 어떻게 비판의식을 갖추게 할 것인가이다. 학벌 사회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한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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