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복지국가 논쟁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원래 복지국가는 진보 세력의 담론인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자유주의 계열 정치권에 의해 달구어지고 있다. 정작 노동운동, 진보 정당 등 진보 세력은 자신의 전공 분야가 민심의 중심에 등장했음에도 복지국가 담론을 펴는 데 소극적이다. 복지국가 논쟁에서 진보 세력이 ‘방어전’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복지운동 연대기구를 만들자는 노동·시민사회단체의 협의 자리에서 복지국가 담론을 사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왜 ‘복지국가’ 담론을 꺼리나

이러한 소극성의 첫 번째 배경에는 주류 정당들과 복지국가라는 공동의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이 진보 세력에게 불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담론을 내놓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다. 녹색, 연대, 평화…. 하지만 미래 담론이 정치적 힘을 가지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성과물이 축적되어야 한다. 복지국가가 김상곤과 무상급식, 보편복지라는 구체적 밑거름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조우혜6월8일 서울 청계광장에 모인 대학생들이 ‘조건 없는 반값 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예를 들어, 녹색국가는 진보 정당 당원과 노동조합원들이 모두 연 20%의 전기 절감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국민에게 인정받았을 때, 연대국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획기적인 연대가 실현돼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총이 아니라 사회연대 노총으로 재탄생할 때, 평화국가는 진보 정당이 친북 세력이라는 우려에서 벗어나 일반 국민과 함께하는 평화운동을 벌였을 때 비로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에 비해 지금 떠오른 복지국가 담론은 진보 세력이 벌여온 무상급식·무상의료·무상교육 운동 등의 성과를 토대로 한다. 2007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은 무엇으로 먹고살 것인가?’라는 성장 담론이 지배적이었고 그만큼 진보 후보는 담론 프레임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에 비해 내년 대선에서 핵심 쟁점으로 등장할 ‘복지국가’는 진보 정당이 보수 세력과 겨루는 데 유리한 의제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복지국가를 주창한다고 피할 일이 아니다. 복지국가 담론을 둘러싸고 이들과 헤게모니 경쟁을 벌여야 한다.

진보 세력이 복지국가 담론에 소극적인 두 번째 이유는 복지국가가 재분배 영역에 한정된 담론이어서 비정규직 문제, 경제구조 혁신 등 근본적 과제를 다루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1980년대 급진적 사회운동의 전통이 남아 있는 한국의 진보정당 운동, 노동운동 일부에게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와 타협하는 개량주의 모델로 치부된다.  

과연 한국에서 복지국가는 진보적 미래 담론이 될 수 없는가? 스웨덴 복지국가를 일구는데 큰 몫을 한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잠정적 유토피아’론을 통해 그 가능성을 살펴보자.

20세기 초·중반에 살았던 비그포르스에게 사회주의는 인류의 최고 가치들을 담은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그는 유토피아와 현실 세계를 잇는 ‘정거장’을 설정했다. 유토피아를 향한 사회운동은 현실 문제들로부터 가능한 더 멀리 벗어나기 위한 탈출 요구에서 비롯되고, 또한 사회구성원의 열망과 가치를 반영하며 끊임없이 활동 방향을 조정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바로 ‘잠정적 유토피아’이다. 그에게 유토피아는 정형화된 체제가 아니라 현실 변화와 끊임없이 조응하면서 조정되는 ‘잠정적 유토피아’로 구체화되는데, 이는 유토피아에 대한 경직된 청사진이 아니라 임시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1980년대를 거치며 형성된 진보 세력에게도 유토피아는 사회주의였다. 그런데 정작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를 거의 벌이지 못했다. 강력한 냉전체제였던 까닭에 사회주의에 대한 정보와 자료의 한계도 있었지만, 동구 사회주의를 준거로 삼은 ‘교과서 사회주의’에 의존한 것도 주요 원인이다.

지금은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이후 사회주의가 지니는 역사적 권위가 크게 훼손된 상태이다. 많은 활동가가 사회주의를 단념하거나, ‘인간 해방’ ‘평등 사회’ 같은 가치나 신념 수준에서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실제 한국 진보 세력이 주장하는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급식, 비정규직 철폐, 재벌 세습 반대,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등은 전통적 진보운동의 기준으로 보면 중도 좌파 수준의 요구이다.

 

 

 

ⓒ뉴시스지난 5월12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래도 한국 진보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혹 자신이 사회주의를 회의할지라도 사회주의에 대한 공개적이고 강한 비판은 자제해왔다. 활동가 대부분이 ‘사회주의’ 족보에서 운동을 시작했고, 현재 진보운동이 미래 비전을 정식화하지 못하는 ‘아노미’에 놓인 상황을 공감하기에, 굳이 사회주의 신념까지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신입 당원에게 설명되지 못하면서도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 조항이 진보 정당 강령에 보존되어왔다.

미래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사회주의

그런데 가끔 사회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는 때가 있다. 복지국가 같은 구체적인 미래 비전이 제기될 때 비로소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개량주의다, 진보의 길이 아니다!”라고. 사회주의가 미래 실천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 복지국가 담론을 경계하는 진보 진영 일부의 대응이 그렇다. 이들의 유토피아는 현실 상황과 무관하게 설정된 도식이기에, 유토피아와 현실 사이를 연계하는 ‘잠정적 유토피아’가 설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인간 실천의 창조성을 고무하기보다 억누르는 구실을 하는 셈이다. 

비그포르스가 활동했던 시기는 사회주의 담론이 시대적 위력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지금 우리는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역사적 상처까지 안고 있다. 시장을 넘어 계획의 효용을 우선시하는 실험이 좌초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잠정적 유토피아는 더욱 ‘잠정적’일수밖에 없고, 그만큼 열린 실천이 필요하다. 이제 유토피아는 과거 깃발을 고수하거나 특정 가치를 선언하는 방식으로는 역사적 권위를 지닐 수 없다. 새로운 사회운영 원리를 곳곳에서 실험하고 그 유의미성을 검증하는 기나긴 과정이 더욱 필요한 때이다.

예를 들어, 호혜와 연대를 경제생활의 최고 가치로 체화해가기 위해서는, 공공 소유인 서울대병원이 경쟁지상주의를 구현하는 삼성병원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공공기관이 철도·전기·가스 등을 제공하는 서민의 벗으로 거듭나야 하며, 궁극적으로 금융서비스·자동차·반도체도 사기업이 제공하기보다는 공동체 영역에서 관리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공평하다고 국민이 생활에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한국 진보운동의 새로운 길찾기 과정에서 복지국가 담론이 중요한 정거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활고에 지친 대한민국 서민이 겪는 좌절을 정치적 열망으로 이끌 수 있는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말이다. 2008년 촛불이 ‘목적지’가 불분명했다면, 지금 민심은 ‘복지국가’라는 구체적 봉우리를 말한다. 복지국가가 ‘정통’ 진보 이론가나 활동가에게는 개량주의 모델에 불과하겠지만, 민생에 허덕이는 서민에게는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복지국가가 담아낼 역동적 에너지 주목하라

물론 최근 한국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기대가 과잉 응축되어 있는 면이 있다. 괜찮은 일자리 만들기, 경제구조 개혁 등 핵심 과제가 자신의 영역에서 해법을 구체화하지 못한 탓이다. 복지국가가 재분배라는 2차 영역만을 다룬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특정한 복지국가 모델을 미리 설정할 필요는 없다. 비그포르스가 지적한 것처럼, 복지국가는 계급 없는 사회도 아니고 경제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된 곳도 아니다. 복지국가는 현재 위치에서 머물지 않고 계속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정거장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대한민국에서 복지국가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지속 가능한 복지국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일자리 확보에 나서야 하고, 이를 위해 중소기업의 토대를 강화하도록 기업 관계의 민주화도 이루어야 한다. 20세기 서구 복지국가와 달리 금융 세계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21세기 한국형 복지국가는 국가의 공공정책 권한을 보장받기 위해 한·미 FTA와도 싸워야 한다. 그래서 지금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것은 부자에게 세금을 걷고, 복지 서비스를 공공화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재벌과 겨루며, 한·미 FTA를 막는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민심의 에너지가 집중된 복지국가 담론에 일자리·경제 개혁 따위 요구를 적극 결합해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유주의 세력까지 복지국가를 내세운다고 진보 세력이 복지국가 담론을 피할 이유는 없다. 더 열정적으로 복지국가 운동을 벌여야 한다. 복지국가가 자본주의 체제를 용인하는 개량주의 모델이라고 한계를 부각하기보다는, 복지국가가 담아낼 서민의 역동적 에너지를 주목해야 한다. 비그포르스가 스웨덴에서 그러했듯이, 진보 세력은 복지국가를 향하고 또 복지국가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까지 1년6개월, 복지국가 이야기가 대한민국에서 만발할 것이다. 복지국가는 진보 세력이 일군 역사적 성과물이면서 지금 민심이 주목하는 담론이며, ‘대안 부재 상황’을 오랫동안 겪는 한국 진보 세력에게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현실과 이상을 잇는 다리 구실도 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민심과 함께하는 희망 담론으로 복지국가를 주목하자. 

편집자 주〉 시사IN 197호 편집 과정에서 원문을 편집하는 가운데 필자의 취지가 잘못 전달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당초 기고문을 게재합니다.

기자명 오건호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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