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라’(백기완), ‘황구라’(황석영)에 이어 구라계의 3대 인간문화재로 등극할 만한 ‘유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일찍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요즘 이 명언을 살짝 비튼다. ‘아이를 가지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19개월짜리 아이를 둔 초보 아빠인 나는 전에는 못 보던, 아니 안 보이던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동네 놀이터가 그중 하나다. 전에는 놀이터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지금은 눈에 띄다 못해 거슬리기까지 한다.

지은 지 10년 된 놀이터는 보기 흉한 물건이 되었다. 미끄럼틀은 녹이 슬었고, 그네 발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친환경 놀이터를 만드는 소셜 벤처기업 ‘더버튼’이 눈에 확 띈 건 어쩌면 당연했다. 사심도 있었다. 이 회사를 아파트 부녀회와 연결해 그네도, 시소도 친환경 소재로 그럴듯하게 만들어보겠다는 기대를 안고 ‘더버튼’ 사무실을 찾았다. 으레 용접도 하고 톱질도 하고 온종일 힘 좀 쓰겠구나 싶어 긴장도 했다.

그런 내게 박수엘씨(25)는 초등학생이 쓸 법한 작은 가위를 안겼다. “친환경 놀이터에서 쓸 자전거 안경을 만드세요.” 잠시 어리둥절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공구리’ 선입견을 간파한 박기범 대표(31)는 “우리도 하드웨어를 앞으로 만들 계획이다. 하지만 그 하드웨어도 아이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언젠가는 흉물이 된다. 중요한 건 콘텐츠이다”라고 말했다. 


ⓒ조우혜친환경 놀이터에 쓸 자전거 안경을 도화지로 만들었다. 놀이기구는 모두 이렇게 직접 손으로 만든다.

작은 가위를 들고 더버튼 사무실 옆에 있는, 칠보산 생태학교 교사이기도 한 박정신 판화작가의 공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수엘씨가 도화지에 본을 뜨고 나는 가위로 잘랐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낑낑댔다. 안경에 색을 입히는 건 놀이터를 찾는 아이들의 몫이다. 작업을 마치자, 박수엘씨가 ‘놀이터 입장료-종이’라고 쓰인 수거함을 가지고 왔다. 만들고 남은 종이를 입장료 수거함에 넣었다.

2009년 창업한 더버튼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미끄럼틀만 남아 있는 수원시 팔달구 우만2동 장고개 어린이공원에서 친환경 놀이터 축제를 연다. 벌써 2년째, 14회를 이어오고 있다. 이 축제에는 입장료가 있다. 알루미늄 캔 2개 또는 폐지 10장(신문 1부 분량) 등 재활용품을 가져와야 한다. 이곳 ‘에코버튼’ 놀이터에서 ‘북극곰을 살려라’ ‘강살리기 낚시왕 대회’ 등을 즐기고, 자기가 쓴 물건을 내다파는 ‘재사용 나눔 놀이터’도 펼쳐진다.

자전거 안경처럼 축제에 쓰이는 놀이기구는 직접 만든다. 사무실 한쪽 창고를 들추니, 1.5t 트럭 한 대 분량의 놀이용 물품이 쌓여 있었다. 모두 재활용품으로 만든 것이다. 쌓인 물품을 보니 처음엔 시시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반전이 숨어 있었다. 상자로 만들어, 조악해 보이던 물고기 밑에는 최첨단 QR 코드가 붙어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찍어보니 ‘황쏘가리는 천연기념물입니다. 천연기념물을 잡았으니 -80점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황쏘가리 사진이 스마트폰에 떴다. ‘놀이’와 ‘환경 교육’을 결합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친환경 놀이 기구 아이디어를 내고 만드는 주역인 박수엘씨는 “소셜 벤처기업은 맞는데, 일하는 건 신개념 가내수공업이다”라며 웃었다. 


ⓒTHE BUTTON 제공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친환경 놀이터 축제에서 아이들이 북극곰 살리기 놀이를 하고 있다.

놀이터 입장료는 폐지와 캔 등 재활용품

더버튼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묻어나는 놀이는 아이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근 선보인 ‘북극곰을 살려라’라는 놀이도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북극곰 가면을 쓰게 하고 전지를 나눠준 다음 그 위에 서게 했다. 얼음 위에 선 북극곰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환경 퀴즈를 내어 틀리면 종이를 반씩 접게 했다. 환경 재앙으로 북극곰이 살고 있는 얼음이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왼쪽 아래 사진).

창업 멤버들은 사회적 기업 학교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전수혜씨(32)는 대학생들이 가장 취직하고 싶어하는 ‘또 하나의 가족’에 5년을 넘게 다녔다. 박기범 대표도 멀쩡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월급이 40~50분의 1로 줄었다. 처음에는 대학생 재능 기부를 통한 환경교육을 접목하려 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게 방치된 놀이터였다. 아이들에게 놀이터를 재활용하고 환경 교육도 하면서 재밌게 놀게 해주자는 환경 놀이터로 발전했다. 더버튼은 마을 환경 놀이터를 넘어 학교 놀이터인 ‘에코 Fun 놀이터’를 구상 중이다.


ⓒTHE BUTTON 제공

자본금 50만원으로 창업한 이들은 지난해에는 3000만원 상당의 매출을 올렸다. 변변한 수익을 아직 남기지 못했지만 사회 환원에는 ‘큰손’이다. 친환경 놀이터 입장료로 받은 폐지와 캔을 팔아서 ‘입장료의 재탄생’이라는 환원 프로그램을 실천했다. 놀이터 주변 우만2동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들에게 야광 조끼 25벌을 사주었다(더버튼의 아이디어에 자극받은 수원시청은 지난해 500명분의 야광 조끼를 사서 폐지를 줍는 수원시 노인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친환경 놀이터 주변에 있는 아주대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과일을 나눠주는 ‘우리 지금 만나’라는 대학생 응원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돈보다는 가치를 추구하는 소셜 벤처기업 창업을 고민하는 후배에게 박기범 대표는 지름길이 아닌 우회로를 택하라고 했다. 박씨는 “막연히 좋은 일만 하자는 심산으로 창업하면 실패하기 쉽다. 사회생활을 충분히 한 뒤 창업해도 늦지 않다”라고 귀띔했다.




이 지면은 세상을 바꾸려는 ‘대안 직업’의 세계를 기자들이 직접 체험하는 난으로, 격주로 연재됩니다.

기자명 고제규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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