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권의 맹주’로 떠오르는 터키가 6월12일 역사적인 총선을 치렀다. 선거 결과는 일반의 예상대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정의개발당(AKP)의 압승이었다. AKP는 국회 총 550석 가운데 326석을 차지해 3차 단독 집권이 가능해졌다. 당이 기대하던, 국민투표 없이 국회에서 단독으로 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의석수(367석)에는 훨씬 못 미치고, 헌법개정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는 의석수(330석)를 확보하는 데도 실패했지만 장기 집권의 발판만은 확실히 다져놓았다.

총선 승리로 에르도안 총리는 3차 연임이 가능해진 것은 물론, 대통령제 개헌을 통해 터키공화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문도 반쯤 열어젖혔다. AKP는 현 내각책임제 헌법을 프랑스식 대통령제로 바꾼 뒤 ‘오토만의 술탄’이라 불리는 에르도안 총리를 초대 대통령으로 만들어 20년 장기집권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 기간 과감한 개혁을 해 터키를 중동에서 가장 현대화된 최강국으로 만든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청와대 사진기자단터키는 지난 8년간 ‘아랍권의 맹주’로 떠올랐다. 서울 G20 정상회의장의 에르도안 총리(맨 오른쪽).

에르도안, 2023년까지 집권?

에르도안 정권이 총선에서 압승한 원동력으로는 지난 8년간 이룩한 눈부신 경제·정치적인 업적을 들 수 있다. AKP 정권은 집권 기간 터키 경제를 세계 25위에서 16위로 끌어올렸다. 집권 직전인 2001년에 -5.7%였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5%의 성장을 지속해 지난해 8.9%까지 수직 상승했다. 개인소득은 8년 사이 3배로 늘었고, 실업률은 11%로 낮아졌다. 8년 동안 자동차 판매율은 120% 가까이 늘어났다. 이 기간 터키는 자동차, 건설, 섬유산업 강국으로 떠올랐다. 2001년에 국내총생산(GDP)의 77.6%이던 국가 부채는 지난해 41.1%까지 떨어졌다. 한때 ‘보스포루스의 병자’로 불리며 국제금융기금(IMF)의 지원을 받던 터키가 오늘날 ‘중동의 중국’이 된 이유다.

정치적 안정도 탄탄하게 다져놓았다. 지난 50년간 군사 쿠데타로 네 차례나 정부를 전복시켰던 군부 세력을 병영 속에 묶어놓은 문민 우위 확립은 에르도안 정권이 이룩한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막강한 군부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터키를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민주적이고, 더욱 풍요로운 나라로 이동시킨 업적을 유권자는 높이 평가했다.

총선 유세 기간 중 에르도안 총리와 AKP가 유권자에게 제시한 공약은 화려하다 못해 현기증이 일 정도다. 공화국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3년까지 이룩하겠다는 ‘터키 2023 플랜’이라는 선거 공약은 ‘꿈의 잔치’나 진배없다. 이 공약에 따르면 일단 2023년 완공을 목표로, 이스탄불을 통과하는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50㎞의 대운하를 건설하게 돼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관통하는 제3의 교량과 터널, 제3의 국제공항도 건설한다. 항공기와 헬리콥터와 전함을 자체적으로 생산한다. 새 주택도 50만호 건축한다. 연간 수출액 500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며, 독자적 위성도 발사하고, 모든 어린이에게 전자 책(e-book)을 지급한다. 전국에 22개 국립병원을 새로 세우고, 신혼부부 10만 쌍을 위한 아파트를 공급한다. 


ⓒAP Photo6월12일 총선에서 승리한 정의개발당 지지자들이 에르도안 총리의 연설을 들으며 환호하고 있다.

이 같은 장밋빛 선거공약이 실현 가능하다고 많은 유권자가 믿는다. 그 이유는 에르도안 정권이 집권 8년 동안 이룩한 눈부신 치적 때문이다. 그동안 터키는 이슬람과 서구의회주의를 혼합한 국가로 변모했다. 유럽 외에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아시아, 옛 러시아연방 등 각지로 무역을 확대하는 한편, 국경을 접한 인접 국가들과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이른바 ‘제로 프로블럼’ 외교를 펼치며 ‘동방외교’를 추진했다. 그 결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면서도 시리아와 이라크, 이란, 레바논, 코카서스와 발칸지방 국가, 팔레스타인 등과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늘 앙앙불락하던 그리스와도 관계가 좋다. 심지어 러시아와는 상호간에 비자 면제 협정을 체결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같은 무장 단체와도 관계가 좋다.

언론 탄압 등 권위주의 정권으로 변질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터키는 지금 자신감에 차 있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애걸’하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자세를 보인다. 동방외교 창안자로 평가받는 교수 출신의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외무장관은 “터키가 유럽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유럽이 터키를 더 필요로 한다”라고 호언한다. 그렇다고 EU 가입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에르도안 총리는 새 내각을 구성할 때 EU 가입 업무를 전담할 부서를 신설해 계속 EU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한때 막강했던 미국의 영향력과 나토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금은 눈치 보지 않고 독자 외교를 거리낌 없이 펼치며 지역 강국으로서 지역 헤게모니 장악의 꿈을 키우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자신만만한 야심으로 뭉친 AKP가 국내적으로는 권위주의 정권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8년 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군부의 날개는 꺾었지만, 이제 스스로가 언론 자유를 탄압하는 정책도 서슴없이 펴고 있다. AKP에 비판적인 언론 재벌인 도한 그룹을 억압하고, 비판적 언론인 68명을 잇따라 투옥하면서 언론에 재갈을 물린다는 비난을 듣는다. 그동안 언론자유 순위(‘국경 없는 기자단체’)는 138위로 추락했다. 1984년 이래 4만5000명의 목숨을 잃은 쿠르드노동당(PKK)과의 피나는 내전을 아직까지 종식시키지 못한 것도 AKP 정권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다.

88년 전 공화국을 건국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뒤를 이어 ‘제2 공화국’ 건설을 꿈꾸는 에르도안 총리가 지향하는 길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 아타튀르크의 ‘케말리즘’ 건국이념에서 벗어나 터키를 이슬람 종교국가로 끌고 가는 것이다. AKP는 개헌을 통해 이 길을 가려 한다. 그런데 개헌을 가능케 하려면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민족주의행동당(MHP)의 원내 진입을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에 AKP는 득표율 10% 선에 미달하면 정당의 원내 진출이 불가능한 약점을 이용해 MHP 소속 의원 10명의 불법 성행위를 담은 동영상을 선거운동 기간 중 인터넷에 공개했다. 이들은 모두 후보직을 사퇴했다. ‘다른 민족주의자’라는 비밀 단체가 벌인 이 ‘추악한 폭로전’의 배후에 AKP가 있다고 야당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에서 MHP는 13%를 득표해 54명을 당선시켰다. 이 같은 MHP의 약진은 AKP가 개헌 발의를 할 수 있는 330석 획득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총선 직후 에르도안 총리는 “야권과 협의해 개헌을 달성하겠다”라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터키가 유럽에 속한 모슬렘의 민주주의 국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아랍권의 이슬람 국가로 남을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에르도안 총리의 원대한 정치적 꿈이 맴돌고 있다.

기자명 뮌헨·남정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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