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신문사 편집국장을 찾아가 항의한다. 편집국장은 진심으로 미안해하지만 이번 경우만은 정정 보도를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국정원에 가보길 권한다. 국정원에서도 뭔가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당장은 어떠한 조처도 취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별일 없을 테니 그저 조용히 지내고 있으라는 식이다. 그러나 조용히 지낼 수가 없다. 도청과 미행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던 K는 마침내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다. 오보가 결국 사실이 되고 만 것.
이 이상한 이야기는 밀란 쿤데라가 쓴 카프카에 관한 에세이(‘저 뒤쪽 어디에’, 〈소설의 기술〉)에 있는 원본을 가져와 우리 식대로 다시 각색한 것이다. ‘카프카에스크(Kafkaesque)’라는 형용사가 있다. ‘카프카적인’이라는 뜻이다. 저런 이야기가 ‘카프카적인’ 이야기다. 한 작가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사례다. 조빔(A.C.Jobim)이 곧 보사노바이고 피아졸라(Piazzolla)가 곧 탱고인 것처럼.
카프카 월드로 초대하는 유용한 가이드가 출간됐다. 구스타프 야누흐가 쓴 〈카프카와의 대화〉가 그것. 1920년 3월 어느 날, 17세의 문학 소년 구스타프 야누흐는 ‘변신’의 작가 카프카를 직접 만나게 된다. 소년의 아버지가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 그곳은 카프카의 직장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이 억세게 운 좋은 소년에게 카프카는, 부러워라, ‘아빠 친구’였던 것이다. 카프카 역시 이 문학 소년을 총애하여 두 사람의 만남은 꾸준히 지속된다. 1924년 6월3일 카프카가 사망할 때까지.
구스타프 야누흐, 4년간의 만남 기록해
삶의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카프카를 만난 것은 구스타프 개인의 행운이겠지만, 그가 그 만남의 기록을 보존해두었다가 막스 브로트에게 보내 이 책이 출간된 것은 우리 모두의 행운일 것이다. 카프카는 어느 편지에서 ‘책은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트리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책은 카프카의 그 ‘도끼’ 같은 소설들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를 카프카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작가와의 인터뷰’ 같지 않은가.
인간 카프카의 모습을 지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매력이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결벽증적으로 엄격했다. 그는 자기 책이 출판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강권으로 출간했을 뿐. 구스타프가 그의 단편 세 편을 가죽 장정으로 제본해서 갖다 주었을 때는 숫제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이 따위는 불에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 내 서투른 글은 모두 없어져야 해요. 나는 빛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내 자신의 고통의 근원으로 빠져들 뿐이에요. 나는 막다른 골목이에요.”(341~342쪽) 그러니 카프카가 이 책의 존재를 반기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카프카라는 ‘막다른 골목’이 누군가에게는 출구로 나아가는 ‘빛’이 되기도 하는 것을 어쩌랴.
그 빛에 눈이 부셨던 경험이 필자에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소설가 오정희 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이 책이 당신의 젊은 날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회고하고 계셨다.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서 한 권의 책을 찾았다. G. 야노욱흐, 〈카프카와의 대화〉, 가정문고, 1976. 한동안 그 책을 파먹었다. 그 책이 다시 나왔다.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